[541호 2023년 4월] 기고 에세이
이승만과 4·19세대의 만남
구월환 전 세계일보 주필
동문칼럼
구월환
사회60-67
전 세계일보 주필
이승만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역사성이 강하고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 땅에 민주주의 체제를 세웠지만 그 체제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가장 많이 받은 학생들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도중하차했다.
그 학생들이 이제 80대 노인이 되어 이승만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의 일단(一端)이 지난 3월 26일 4·19세대의 이승만 묘소 집단참배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 얘기가 나오면 찬반양론이 시끄럽지만 그동안 정쟁과 이념갈등의 장(場)에서 굴곡된 부분이 많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제 민주정부 4·19혁명 후 63년이 된 시점에서 뒤돌아볼 때 이승만을 다시 보자는 움직임이 4·19세대에 의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어떤 지도자건 간에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떼놓고 논할 수 없다. 우리가 1948년 처음 도입한 민주주의는 영국이 원조다. 1215년 왕권견제를 위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선포 이후 700년간에 걸쳐 온갖 풍파를 겪어가며 만든 것이다. 이런 제도가 우리나라에는 하루아침에 이식됐으니 시련과 혼란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4·19 당시에 우리 학생들이 좋아하는 민주주의 대통령은 미국의 조지 워싱턴과 링컨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실제로 전개되는 민주주의는 너무 달랐고 실망이 컸다. 그러던 차에 3·15부정선거가 터졌고 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이승만과 자유당을 집어 삼켰다.
그는 4·19 발발 1주일 만에,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며 하야했다. 병원에 들러 부상학생들에게 “장하다, 장해! 불의를 보고 일어서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지”… 이런 말도 남겼다. 3·15선거만 해도 조병옥의 사망으로 그의 당선은 ‘떼논 당상’이었으나 그의 나이가 85세의 고령인지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는 이기붕 일파의 농간이 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
그후 지금까지 12번의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원리주의적 기준을 대치할 현실적 경험적 잣대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승만 이외에 대통령 11명, 총리(장면) 1명의 집권을 겪어보았다. 그들 중에 과연 누가 이승만을 능가할수 있을까?
지도자의 공과(功過)는 항상 논쟁적이다. 공로가 허물을 상쇄하고 얼마나 남느냐가 문제다. 아직 정해진 계산법은 없다. 따라서 양심과 균형감각이 제일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제 80 나이를 넘겨 아무 정치적 욕심이 없는 4·19세대의 재평가 움직임은 주목할만 하다.
이승만은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시대, 해방과 건국, 6·25전쟁 등 가장 격동이 심했던 한국사의 현장을 맨 앞에서 헤쳐나간 리더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선택한 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오늘의 번영이 가능했을까?
민주주의 문화가 전무했고 최빈국에 속했던 신생 독립 약소국이 집요한 공산화의 위협 속에서도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데에서 초대 대통령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이승만은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