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호 2020년 1월] 문화 나의 취미
“57세에 처음 밟은 대학로 무대, 가족 오면 긴장돼요”
김인수 삼창빌딩경영 대표·연극 배우
“57세에 처음 밟은 대학로 무대, 가족 오면 긴장돼요”
김인수(건축74-79) 삼창빌딩경영 대표·연극 배우
“나, 연극 해.” 쉰 살을 훌쩍 넘긴 김인수(건축74-79) 동문이 처음 말했을 때, 친구들은 당연하게 물었다. “제작이야? 연출이야?” 이어진 그의 답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아니, 배우야.”
김 동문은 벌써 20년째 연극에 푹 빠져 있다. 삼창빌딩경영 대표로 일하며 본회 관악극회와 공대 동문극회 ‘실극’에서 활동 중이지만 아마추어 배우를 뛰어넘었다. 대학로에 진출, 극단 ‘노을’ 멤버로 10년째 프로 무대에도 서고 있다. 12월 31일 충정로 삼창빌딩에서 그를 만났다. 두 동문극회의 연습실로 내어주는 넓은 방 한쪽 벽에 관악극회, 다른 벽에는 실극의 역대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대학 시절 공대 연극반이었어요. 졸업 후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들을 이어받아 바쁘게 지내느라 20년 정도 연극을 잊었죠. 그러다 실극 회장을 맡게 되고, 10년 전쯤 하던 사업을 간추리면서 잠재돼 있던 연극에 대한 열정이 불붙더군요.”
실극과 관악극회 공연을 하다 보니 ‘기왕 연극하는 거 대학로에서 프로 배우로 뛰어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2009년 극단 ‘노릇바치’가 올린 ‘안티고네’에 출연한 적 있지만 연기를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었던 터. 대학로 극단에서 운영하는 워크숍을 찾아다니며 발성 훈련과 대사 읽기, 독백 연습은 물론 작품 해석하는 요령까지 기초를 다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디션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2011년에 안톤 체호프의 작 ‘사랑’이라는 극에 오디션을 보고 발탁됐습니다. 여주인공 아버지 역할이었죠. 3, 40분짜리 짧은 극이어서 내 역할의 대사를 거의 다 외워 갔는데 준비를 철저히 해온 걸 좋게 봐주셨나봐요. 대학로에 젊은 배우는 많아도 나이 든 배우는 드물어 ‘블루오션’인 것도 덕을 봤죠.”
오세권 순천향대 연극과 교수가 만든 극단 ‘노을’은 관악극회와 실극의 진지하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겪은 그와 잘 맞았다. 여기에 실극에서 연출로 섭외한 것이 인연이 되어 전 훈 연출가가 운영하는 극단 ‘애플씨어터’에서도 활동하게 됐다.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주로 올리는 곳이다. “체호프의 작품엔 모든 연령대가 등장해요. 다들 ‘아는 극단이었겠지’ 생각하는데 오디션 봐서 출연했다고 하면 깜짝 놀라요. 50 넘어 새롭게 도전한다고 오디션 보러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연출가들도 놀라고요.”
관악극회 2019년 공연 ‘망자 죽이기’에서 열연 중인 김 동문
그의 모습에 고무받아 대학로와 전혀 교류가 없던 실극에서도 프로에 진출하는 단원들이 생겨났다. 처음 프로 극단에 들어갔을 땐 젊은 사람들과 융화되는 것이 어려웠다고 돌아봤다. “동문 극회는 선후배 사이니까 편하지 대학로에서 저를 나이 들었다고 선배 대접해줄 리 있나요. 연기하다 보면 의견 충돌도 잦고요. 처음엔 제 고집을 부렸지만 웬만하면 젊은 사람들 하자는 대로 하고 깍듯이 대하는 ‘처세’를 익혔습니다. 초반엔 밥 한 끼라도 사주면서 노력 많이 했어요.”
공학도이자 사업가인 그는 언제부터 예술적 감성을 싹틔웠을까. “원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선호가 있었다”는 설명. 경기고 문예반 시절 쓴 소설이 교내 ‘화동문학상’에 당선된 적 있다. 대학에 들어와 연극반을 택한 이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건 처음 말하는 건데… 집에서 하는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서였어요. 비즈니스를 하려면 연기력이 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연극반에 들어간 겁니다(웃음).”
그렇게 시작한 연극이 이제는 그 자체로 좋아 일상이 됐다. 늦게 시작했지만 기간에 비하면 다양한 무대 경험을 했다고 자부한다. 정극 외에도 경험을 쌓으려고 젊은 이들이 많이 보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 상업극까지 했다. “집사람이 안 좋아했죠. 매일 연극 한다고 늦게 들어가고, 먹고사는 일이 따로 있는데 왜 상업극까지 하냐고요. 상업극은 하루에 몇 번씩 몇 개월 동안 장기공연을 해요. 한 달에 100만원 정도를 받아 아내에게 몽땅 갖다주면서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죠.”
이제 웬만해선 무대에 나갈 때 떨지 않는 그도 캐스팅을 쥐고 있는 연출자들과 가족이 보러 왔을 때는 긴장된다고 했다. “어떤 관객보다 무서운 관객이 가족이에요. 특히 아내가 오면 긴장이 돼요. 아주 거침없이 평가해 주거든요.”
젠틀한 외모의 그는 최근 배역의 스펙트럼이 부쩍 넓어졌다. 옛날엔 의사나 교수처럼 지적인 캐릭터를 많이 했고 요새는 ‘한물 간 귀족’ 같은 역도 들어온다. “‘인생 연극’을 꼽자면 몇해 전 실극에서 올린 ‘잉여인간 이바노프’에서 몰락한 지주 ‘차베스키’ 역에 완전히 몰입돼 연기가 너무 재밌더군요. 관악극회 ‘망자 죽이기’에선 친구 부인과 바람을 피우는 역이었어요. 실제로는 상상도 못 할 연기를 하는 묘미가 있었죠.”
2019년의 마지막 밤도 김 동문은 무대 위에서 보냈다. 근래에 1년에 대여섯 편씩 다작을 했기에 새해엔 양보다 질을 우선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꼭 해보고 싶은 작품도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아버지 윌리 노먼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이순재 선배가 많이 하셨던 배역인데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던 남자의 일생을 보여주는, 페이소스가 있는 역할이죠. 연극은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좋은 취미예요. 매년 열리는 시니어 연극제나 실버 연극제를 보면 저보다 더 나이 많은 배우들도 나와서 열연을 하거든요. 저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