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호 2023년 7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지금 있는 것과 없는 것
지금 있는 것과 없는 것
신영선
국문97-03
극단 팀스케네 대표·극작가·연출가
모교 노문과·추계예술대 출강
학교 ‘지박령’인 나는 아직도 관악캠퍼스 3동에 산다. 3동 4층에는 지금 소속인 노문과가 있고 2층 휴게공간에는 지금은 사라진 인문극회 동아리방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룸’이라 불렀다. 무대를 대신하던 덧마루와 대파(조명기)가 있고 캐비닛에는 몇 십 년이 되었는지 모를 연극 관련서들이 제법 꽂혀 있었다. 선배가 그린 그로테스크한 벽화가 벽을 뒤덮고 항상 조용히 앉아 스크래치화를 그리던 후배가 있었다. 선배는 철학 선생님이 되고 후배는 작가가 되었다. 비오는 수요일이면 탕수육을 시켜먹고 테이블에 조금 흐른 고량주에 불을 붙여 파란 알코올 불꽃을 구경했다. 불이 꺼진 밖으로 먼지와 꽁초 쌓인 테라스와 겹벚나무가 보였다. 당시 극회사람들의 카톡방이 있고 가끔 생사무탈 여부를 확인한다. 룸은 없어지고 사람이 남았다.
극회는 인원이 적어 등장인물이 많은 고전극을 하기 힘들었다. 사람이 적게 나오는 대본을 찾다 보니 다섯 명이 나오는 카뮈의 ‘오해’가 걸렸다. 대사가 아름답지만 역시 길다. 출판본을 펼쳐놓고 빼도 되는 대사와 아닌 것을 골랐다. 반 이상 덜어내니 공연시간 60분이 나왔다. 작은 공연이어서 두레문예관 101호에서 설치되어 있던 조명을 켜놓고 했다. 지금은 한쪽 면에 거울이 있지만 그때는 없었다. 동아리 지도교수님이 보러와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일이다. ‘잘라낸 흔적이 보이지 않고 처음부터 그렇게 쓰여진 것처럼 자연스럽다’고 해 주셨다.
그때 대본을 만지는 일이 할 만하다고 처음 생각했다. 그 각색이 나의 첫 번째 극작 습작이 되었다. 지금은 그런 말씀을 왜 하셨는지 여쭙고 싶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희곡을 업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잊으셨겠지만 어려서 듣는 어른의 한 마디는 큰 법이다. 선생님은 퇴직하신 지 오래고 나는 아직 학교에 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막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극회 회장이던 친구가 그 해 연출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소주를 세 병쯤 마신 뒤라 내가 나서기로 했다. 이유는 기억할 수 없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꼭 집어 하겠다고 했다. 취해서 잊었다는 건 대부분 거짓말이다. 나는 잊었다는 거짓말을 못해서 다시 ‘메데이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배우가 부족했고 희랍비극의 긴 대사는 거창했다. 여름방학 때 워크숍을 하면서 신입회원들을 유혹했다. 문화관 대강당 무대 위에 작은 무대를 깔고 객석을 쌓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극장의 무대 위란 각별한 공간이었다. 막막하게 올려다 보이는 어두운 극장 상부, 먼지 냄새와 낡은 마룻바닥, 정적을 깨기 힘든 극장의 침묵이 압박해오는 긴장감이 있었다. 11월 말, 순환도로를 가득 메운 은행잎을 퍼다 무대에 깔고 싶었지만 참았다. 공연이 12월 초로 미뤄진 탓이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이다. 낙엽의 뒤치다꺼리는 고사하고 냄새는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이아손의 황금양털을 금실로 자아내는 물레를 얹고 예쁜 후배님들이 물레 돌리는 노래를 불렀다. 공연은 즐거웠고 관객들은 관대한 갈채를 보내주었다. 에우리피데스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다시 60분이었지만 카뮈보다 훨씬 더 많은 작업을 요했다. 공연을 올려놓고 보니 구성이 너무 달라졌다. 나는 각색에 한국적 소재를 덮어씌운 다음 창작이라 우기기로 했다. 두어 번 덮어씌우고 나니 희곡상을 하나 받게 되었다. 희곡상을 받으니 극작가라 우길 수 있게 되었다. 문제의 수상작은 아직 공연을 해보지 못했으니 20년차 극작가의 데뷔작이자 미발표작인 셈이다.
학교의 추억은 그 자체로 자라온 과정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그 무엇이기도 하다. 공연은 지나가고 사람은 같이 나이 들어간다. 나는 아직 학교에서 희곡을 읽고 쓴다. 추억은 팔았는데 실력이 늘지 않아 큰일이다. 방학이니 정신을 차리고 좀 더 읽고 써 보기로 한다.
*신 동문은 모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노어노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극작가이자 연출가, 극단 대표로 연극과 오페라를 만들고 있다. 옥랑희곡상, 기독교 문화대상 연극부문, 대한민국오페라대상 창작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모교와 추계예술대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