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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021년 10월] 문화 나의 취미

국어책 모으다 보니 어느새 3000권

김운기 전 동단건축 대표·안양지부 사무국장
 
국어책 모으다 보니 어느새 3000권
 
김운기(응용미술78-82)
전 동단건축 대표·안양지부 사무국장



대한제국·일제 출간 희귀본도 
내년 개화기 교과서 전시 예정


“불과 한 세기 동안 대한제국 학부, 일본 총독부 문부성, 미 군정청 학무국, 대한민국 문교부까지 4개 정부에서 펴냈으니 이런 국어책의 운명이 세상에 또 어딨겠습니까. 국어교과서는 너무 흔하다고 여겨 누구도 관심 두지 않고 소홀히 했단 걸 책을 모으면서 알게 됐죠.” 

‘이렇게 방대한데, 그동안 누구도 관심 두지 않았다니’. 30년 넘게 혼자 힘으로 국어교과서 3000점 가까이 모았다는 김운기(응용미술78-82) 전 동단건축 대표 얘기에 든 생각이다. 그의 컬렉션은 국정교과서 약 900여 점에, 민간 출판사에 맡겨 발행된 검·인정 교과서 1900여 점. 10월 8일 안양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동문은 “오기로 시작해, 사명감으로 지속한 일”이라고 했다. 

“국어책은 원래 헌책방서 팔지도 않았습니다. 파지로 넘기려 구석에 쌓아두고, 헌책 살 때 한 권 달라면 덤으로 주는 물건에 불과했죠.” 자주 드나들던 헌책방에서 폐지 뭉치로 넘어가는 교과서를 보고 아까운 마음에 한두 권씩 사들이다 흥미가 생겼다. “같은 ‘토끼와 거북이’ 단원인데 1950년대 교과서는 ‘토끼는 빠르오, 거북이는 느리오’ 하는 고어체, 60년대 교과서에선 ‘토끼는 빠릅니다’라고 현대어체로 돼 있어서 모아보면 비교하는 재미가 있겠다 싶었죠.”   

시작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수집 목록을 만드는데 책이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죠. 당시 문교부 편수국에도 가보고, 국정교과서 회사도 찾아가 봤으나 비치된 자료 한 권 남아 있지 않았어요. 정부 수립 되고 40년 넘게 책 만들어서 팔기만 했던 겁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어요.”

 주말이면 전국 헌책방들을 순회하며 때로는 한 달 월급을 털어 낡은 교과서와 맞바꿨다. 그의 수집 목록은 자연스럽게 국어교과서의 계보가 됐다. 조선시대 운서와 자전류, 초학 입문서인 천자문과 훈몽서류, 개화기 근대교육기관에서 배우던 우리말 독본류 등 국어교육의 뿌리가 되는 책들까지 그러모았으니 “내게 없으면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말 그대로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책은 없지만 더 마음 쓰이는 책은 있다. “‘언문’ 대신 ‘국어’를 처음 쓴 게 1907년 나온 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입니다. 3년 만에 한일합방이 되자 ‘조선어독본’이 됐죠. 1939년 나온 ‘조선어독본’은 가장 불행한 책이에요. 명분상 출간은 했지만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실제 교육현장에 배포되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철수, 영희(당시 ‘영이’로 표기), 바둑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교과서에 등장한다. ‘바둑이와 철수’(1948)라는 전에 없이 독특한 표제에 대해 그는 나름대로 해석을 내놨다. 

“집안에 아기가 탄생하면 어른들께서 아기 이름을 짓잖아요. 얼마나 설레고 감격했으면 일반명사 ‘국어’를 마다하고 고유명사를 택했나 싶죠. 당시 발간된 ‘한글교본 교사용 지침서’ 서문을 봐도 ‘드디어 우리 국어책을 낸다’는 벅찬 기쁨이 가득해요.” 사람보다 동물 이름을 앞세운 건 “한글 창제 정신에 걸맞은 휴머니즘 아닐까” 너스레를 떤다.  



김운기 동문 소장 '바둑이와 철수(1948)', 국어1-1 <바둑이와 철수>(1950), 초등국어 5-1(1948) 교과서.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25일 재간된 ‘바둑이와 철수’는 그의 소장본 외에 지금까지 발견된 적 없다. 갱지 한 장을 16절로 접어 만든 전쟁 시기 딱지본 교과서는 당시 열악한 교육여건을 보여준다. 이렇게 살아남은 책과 유명 국어학자의 장서인, 서명이 있는 희귀본까지, “원하는 자료를 손에 넣으려면 부지런함과 친화력은 필수다. 정초엔 수집가들에게 세배도 많이 다녔다”는 말에 집념 어린 지난날이 엿보인다. “아내의 협조 없인 여기까지 올 수 없었지만, 솔직히 트러블도 있었다”며 웃었다. 

어느 시점부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어떤 의무감마저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셨어요. 제가 학교에 남기를 바라셨죠. 아버지가 바라시던 교육자는 못 됐어도, 교육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어요. 그런 의지 때문에 값나가는 미술품, 골동품도 아니고 흔하디 흔한 국어교과서에 반평생을 몰입할 수 있었어요. 보고 느낀 분위기가 있었던지 제 아들이 선생님이 됐습니다.” 

국어교과서는 이제 다른 의미로 귀하다. 학기가 끝나면 교과서 만든 회사에서 일괄 수거해 펄프로 만들어 버리니 시중에 헌 교과서는 유통되지 않는다. “신종 분서갱유죠. 너무 흔해 귀한 줄 몰랐던 국어책이 값비싼 책이 됐습니다. 그래도 내가 발버둥친 덕에 가치가 전파된 게 아닌가 싶어요.” 개인이나 기관 수집이 늘고, 교과서 회사가 뒤늦게나마 교과서 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마치 운명처럼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듯 모든 걸 이어 줬다”고 그는 돌아봤다.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우, 현대 등에서 건축 관련 업무를 하면서 건축설계 자격을 취득한 후 건축회사를 오랫동안 운영했다. 건축가, 서지가이자 등단 20년이 넘는 중견 시인이다. 시집 여러 권과 한문 고전 번역서를 냈다.  

방대한 자료를 개인이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긴 어렵다. 여러 곳에 책을 분산해 과학적으로 수장하면서 기회 될 때마다 전시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내년 이맘때쯤 조선 후기 훈몽교과서, 개화기 국어관련 교과서에 한해 전시할 계획입니다. 우리말 장전(章典)인 국어교과서가 우리가 소홀히 하는 동안 주위에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기회 될 때마다 이런 자료들을 한곳에 모아, 국어의 유산들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