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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2023년 9월] 문화 나의 취미

“연극, 풍산개, 클래식…빠졌다 하면 끝장 봐야죠”

송재경 (치의학94-00)서울굿모닝치과 원장
나의 취미
 
“연극, 풍산개, 클래식…빠졌다 하면 끝장 봐야죠”
 
송재경 (치의학94-00)서울굿모닝치과 원장


극단 두 곳서 배우·번역자 활동
치대 음악그룹 ‘개구장애’ 결성도


화동연우회는 연극계에서 유명한 아마추어 극단이다. 경기고 동문 극단으로 신 구, 한진희, 이근희, 최무성 등 프로 배우들도 활동했다. 특징은 ‘국내 초연’이 많다는 점. 매년 연말 화동연우회 공연에 연극 관계자들이 찾아오는 이유다.

송재경 동문은 최근 몇 년간 화동연우회 초연작의 번역을 맡았다. 미국에서 유명 추리 장르 상을 수상한 ‘싸이킥’, 이집트 작가가 쓴 ‘바퀴벌레의 운명’ 등 숨은 진주 같은 작품을 발굴해 국내에 선보였다. 치과인 극단 덴탈씨어터까지 두 곳의 극단에서 활동 중이다. 8월 24일 여의도 송 동문의 병원에서 만났다.   

“처음 한 번역이 ‘싸이킥’이었어요. 시놉시스가 너무 좋아 아무도 안 시켰는데 희곡을 사서 번역을 했죠. 화동연우회 모임에 가져가니 연출하는 친구가 ‘형, 이거 어디서 찾았어? 번역까지 돼 있네’ 해서 공연이 됐는데 첫날만 빼고 계속 만원이었어요. 초대받지 않고도 소문 듣고 찾아오더라고요.”

귀한 작품을 알아서 번역까지 해오니 예뻐만 할 것 같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함께 원문을 보며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번역 수정과 각색을 하고, 연습엔 선배들까지 찾아와 신랄한 지적을 날린다. 화동연우회 특유의 ‘사사건건’ 문화다. “연극에 진심인 열 살, 스무 살 위 선배들이 대본을 꿰뚫고 오셔서 ‘이렇게 해야 하지 않아?’ 지적하시는데, 그 ‘사사건건’이 있고 없고 차이가 커요. 그렇게 살벌하고 치열하게 하니까 화동연우회 공연을 보러 오는 연극인들이 있는 겁니다. 국내 초연도 초연이지만, 작품 해석이 프로 못지않거든요.”

처음엔 배우로 극단 활동을 시작했다. 7분짜리 첫 배역으로 시작한 연기가 그에겐 ‘살면서 제일 느리게 배운 것’이었다. 무대 위 서열은 졸업년도와 무관한 실력 순, 좌절해 잠시 극단을 떠나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덴탈씨어터에 스카우트 돼 주인공도 해보면서 시나브로 연기의 참맛을 깨달았다. “대사에 감정이 실리더라고요. 거짓말을 조금 더 잘하게 된 거죠. 연기에서 중요한 건 상대방을 듣고, 보는 거예요. 그래야 상대에 리액션이 되고 호흡이 맞죠. 집중도 중요해요. 한 공연에서 시장 역할을 맡아 관객을 보면서 대사를 하는데 관객석이 하나도 안 보여요. 완전히 집중한 거죠. 객석에 있던 선배도 ‘재경이가 안 보이더라. 시장만 있더라’ 하더라고요.” 

경기고 동문 극단인 화동연우회 공연에서 송재경 동문(오른쪽)이 이근희 배우와 연기하는 모습. 


“번역한 극이 공연될 때, 대본의 활자들이 일어나서 연기하고 있는 엄청난 느낌”이 좋아 지금은 번역이 주가 됐다. 일찌감치 좋은 대본 알아보고 번역까지 다 마쳤는데, 작은 극단이라며 원작자가 라이센스를 내주지 않은 적도 있다. 몇 년 후 유명 극단이 초연했을 땐 “속이 상해 못 보겠더라”고 했다. “대학로 프로 극단에서 제 번역본을 쓰겠다고 할 땐 팸플릿에 화동연우회 초연, 최초 번역자 송재경만 쓰는 조건으로 내어줬죠. 좋은 작품으로 가는 징검다리, 계단 역할을 한 데 만족해요.” 

아마추어 극단이니 입장료도 없고, 사비 각출과 후원으로 대관료와 제작비를 충당한다. 공연 준비에 들어가면 퇴근 후 개인 시간은 사라진다. 다신 안 한다 해놓고 몇 달 지나면 또 슬금슬금 ‘연극하자’며 모여드니 연극도 중독성이 있나 보다. “3개월간 저녁마다 만나서놀고, 야단 맞으면서 논 것뿐인데 결과물이 나오고 사람들이 보고 잘했다, 못했다 얘기하잖아요. 그게 좋아 계속하는 것 같아요.”

주변에서 ‘자유로운 영혼’ 소리 많이 들었다는 송 동문. 모교 입학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전에 고려대 공대와 카이스트 대학원을 거쳐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박사과정까지 진학한 공학도였다. 사람을 치료하고 싶다는 오랜 꿈을 좇아 치대에 들어왔고, ‘다시 찾은 청춘’을 만끽했다. 치대 볼링동호회 ‘ABC’, 노래동아리 ‘아침이슬’ 활동에 동기들과 음악그룹 ‘개구장애’도 만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 타이틀 ‘엘도라도’는 아는 사람은 아는 가요계 명곡으로 꼽힌다.

자타공인 풍산개 애호가이기도 하다. 예과 1학년 때 기르기 시작해 한때 80여 마리까지 풍산개를 키웠고 한국풍산개협회 고문도 지냈다. “주인을 섬길 줄 알면서도 외력의 침입에 용맹하게 대항하는 개예요. 아파트에 살아서 못 기르는 지금도 풍산개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요즘엔 피아노 협주곡에 푹 빠져 마음 속 연극의 비중을 넘보고 있다. 10년 뒤엔 직접 연주하는 게 목표다. “연극과 음악은 동질성이 있다. 배우는 연주자, 연출은 지휘자. 오케스트라인 다른 배우들과 더불어 작가의 대본을 표현하고 창작하는 과정이 같다”고 설명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구나’ 싶겠지만 당시 제겐 ‘하고 싶은 일’보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어요. 치대에 간 것도, 풍산개도, 연극도요. 제 동기들이 이제 40대 후반인데 만나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애들 핑계, 가족 핑계 대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라’ 말해줍니다. 나도 행복하고, 주변도 밝게 해주는 일이라면 그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새로 번역을 시작했다는 그는 “일단 극단에 들이대 볼 텐데, 꼭 공연됐으면 좋겠다”며 웃음지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