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호 2023년 12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날라리는 오늘도 무대를 누빈다
유지향 숲해설가·작가
날라리는 오늘도 무대를 누빈다
유지향
산림과학12-16
숲해설가·작가
십 년 전, 두레문예관에서 뮤지컬 ‘빨래’를 한 적이 있다. 서울대 뮤지컬 중앙동아리 ‘렛미스타트’에서 하는 공연이었다. 친구가 배우로 나온다길래 응원차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티켓값이 오천원이었는데 오만원을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역시 서울대 사람들, 뭐든 마음먹으면 끝장을 내버린다니까.’ 혀를 내두르며 공연장을 나왔다.
특히 무대 위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친구가 부러울 정도로 멋있었다. 나도 연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곧바로 코웃음 쳤다. ‘내가 연기는 무슨!’ 어설픈 연기 생각은 접고, 하던 밴드 활동에 몰두하기로 했다.
당시 농생대 밴드 ‘샌드페블즈’ 40번째 키보드를 맡고 있었다. 샌드페블즈도 연습량은 끝장나게 많았다. 학기 중에는 3시간, 방학 때는 8시간씩 평일 내내 연습했다. 그렇게 일 년을 바치고 나니 키보드를 처음 다뤄본 나도 제법 근사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연주뿐만 아니라 소리 만드는 법, 다른 악기와 합을 맞추는 법 모두 선배들이 가르쳐줬다. 덕분에 일 년 만에 수준급 공연을 올렸다. 샌드페블즈는 음악 실력 외에도 다양한 전통을 지켜오고 있었다. 나이가 같아도 선배에게는 높임말을 써야 했다. 공연을 마치면 꼭 낙성대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고, 대학동 녹두거리에서 동동주를 마시며 ‘라떼는 말이야’를 나눴다.
그 시절 별명은 ‘날유’. 날라리 유지향의 줄임말이었다. 록(Rock) 음악은 몰라도 무대에서는 누구보다 잘 놀았다. 공연마다 머리카락 색을 빨강, 검정, 노랑, 갈색으로 바꿨고, 관객들의 환호성을 받으면 지하 연습실에 처박혀 연습하던 피로가 싹 풀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밴드도 졸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무리했다.
이후 무대 오를 일이 없었는데 십 년이 지난 지금은 밴드가 아닌 연극 무대에 서 있다. 올해 초 지인에게서 “혹시 연기해 볼 생각 없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순간 십 년 전 묵혀뒀던 마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연기를 한다고?!’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는 성미를 참지 못하고 직장인 극단에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33년 전통을 가진 연극패였다. ‘연극이란 무엇인가’부터 발성, 호흡, 분장, 인물 분석하는 법까지 선배들이 가르쳐줬다. 저녁마다 지하로 가는 발걸음, 나이 상관없이 기수에 따른 호칭, 언제나 같은 식당에서 뒤풀이, 자주 가는 술집까지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았다.
연극패와 밴드를 비교하며 전통을 가진 동아리, 동호회 비결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던 중, 지난 11월에 신입 공연을 올렸다. 석 달 동안 매일 저녁 지하에서 공들인 끝에 대학로의 한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과 동기들도 공연을 보러 왔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밴드 공연을 마치고 사진을 찍었던 그때처럼 기념 사진을 남겼다. 동기가 SNS에 사진을 올리며 ‘날유 is back.’이라고 썼다. 밴드 무대에서 키보드를 치던 날유는 십 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니 졸업 후에도 숲해설가로 일하면서 숲이라는 무대를 누비고 있다. 계절마다 벚꽃, 단풍, 알록달록 조명이 비추고, 새 소리와 시냇물 소리 흐르는 음향 안에서 숲 이야기를 들으러 온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독자에게 글로 생각을 펼치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퇴고에 퇴고를 거친 끝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는 얼마나 짜릿한가! 남들에게 주목받고, 인정받기 좋아하는 성격은 여러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전에는 ‘낮에는 숲해설가, 밤에는 글 쓰는 작가 유지향’이라 소개했는데, 작가보다 배우로 활동하는 밤이 길어진 만큼 인사말을 바꿔야겠다. ‘반갑습니다. 낮에는 숲, 밤에는 연극 무대를 누비는 작가 유지향입니다.’
*유 동문은 모교에서 산림환경학을 전공했다. 생태적 삶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전북 변산공동체학교 교사로 몸담았고, 현재 숲해설가이자 동물권 활동가·프리랜서 작가 등 ‘N잡러’로 살고 있다. 20대 시절의 생각과 경험을 담은 에세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난’을 펴냈다.
유지향 동문의 에세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