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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호 2023년 1월] 문화 나의 취미

소똥, 진흙, 쌀가루로 벽에 그린 그림…영월에 가면 인도가 있다


소똥, 진흙, 쌀가루로 벽에 그린 그림…영월에 가면 인도가 있다


인도미술 수집가 박여송(응용미술72-76)
인도미술박물관장



42년간 현지서 1500점 모아
남편 백좌흠 동문은 인도 지역연구


충북 제천역에서 영월 주천면 쪽으로 차를 타고 20여 분 가면 인도미술박물관이 나온다. 인도의 성을 닮은 형태에 ‘핑크 시티’로 불리는 인도 자이푸르가 떠오르는 핑크빛이 눈에 띈다. 박여송 관장이 2012년 남편 백좌흠(법학72-76) 전 경상대 법대 교수와 함께 세웠다.

민화와 조각, 공예품, 텍스타일(섬유) 작품까지 300여 점의 박물관 전시품을 오로지 개인 힘으로 모았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나마도 1981년부터 수집한 컬렉션 1500여 점의 일부라면 입이 떡 벌어진다. 수집가의 꿈은 박물관에 종착하게 마련. 전국 유일의 박물관 특구로 지정된 영월군의 제안으로 폐교한 초등학교 자리에 박물관을 세운 것에 대해 “운이 좋았다”며 박 동문은 빙긋 웃었다. 12월 28일 박물관에서 그가 건넨 따뜻한 차이 티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1981년 백좌흠 동문이 국제로타리재단 장학금을 받아 델리대 법학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박 동문도 5년간 일하던 우표디자이너직을 그만두고 인도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신혼여행 삼아 인도 전역을 여행하던 박 동문 부부는 인도 미술에 매료됐다. 그곳은 다양한 인종과 종교를 바탕으로 수많은 신화와 의식이 깃든 독특한 전통들이 난장(亂場)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정형화된 미술 교육을 받은 박 동문에겐 인도의 민속 미술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인들이 새벽에 일어나 가정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쌀가루로 만다라를 그려요. 정성을 다해서 그리는 기도 같은 그림인데 이게 ‘진짜’ 그림이다 싶었죠. 자연적인 재료를 많이 사용해요. 14억 인구 중 1억명 정도가 부족민으로 분류되는데 부족마다의 독특한 미술을 볼 수 있어요. 왈리 부족은 흙벽을 캔버스 삼아 소똥을 바르고 쌀가루로 그림을 그리는데 숲 속의 자신들의 생활을 솔직하게 표현한 모습은 아이들 그림을 대하는 듯했어요. 피카소 그림을 봤을 때보다 더 강렬한 감동을 느꼈죠.”

운도 따랐다. 수집을 시작할 무렵 기나긴 식민지 시대를 벗어난 인도는 단절된 문화를 복구해 보전하려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양질의 작품이 미술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부부는 그 가치를 일찍 알아봤다. “인도 사람들이 예전부터 벽화를 많이 그렸어요. 주로 자기 집 벽에 그리던 걸 당시 장인들을 시켜 종이나 천에 재현하고 있었죠. 그때가 아니었으면 구하지 못했을 작품들이에요.”

“여행에 지참한 비상금은 작품과 맞바꾸고, 인도로 올 때 혼수로 어머니가 한복에 달아준 금단추까지 팔았다”며 웃음지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수집품을 실어 나르고 한국에 온 후에도 인도 미술과 박물관 연구를 계속했다. 박 동문은 뉴델리에서 한·인 수교 30주년 기념 특별전 등 네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백 동문은 한국인도학회에서 활동했다.



인도미술박물관 전경 


박 관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첫 번째 전시실엔 안드라프라데쉬의 칼람카리그림, 서벵갈의 두루마리그림, 라자스탄의 파드그림, 세밀화, 부족민 그림이 벽마다 가득했다. 이어 인도의 대표적 민화라 할 수 있는 마두바니 그림과 왈리 부족 그림, 조각까지. 친절한 설명 속에 수많은 신들과 부족, 주민의 이야기가 스쳐갔다. 왈리 부족 그림 앞에선 의외의 정교성과 천진난만함에 감탄과 웃음이 함께 나왔다.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인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것 같아요. 인도 중부지방의 빔베트카 벽화군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데 ‘오늘 뭘 했다, 무슨 축제가 있었다’ 같은 걸 그림일기처럼 그려 뒀죠. 그림 그리는 사람 입장에서 정말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예술 행위고 현대 미술 작가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자기의 삶과 상관 없는 그림을 그리는 건 ‘진짜’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인도에서 전통 염색기법을 배운 박 동문은 섬유 작품에도 적지 않은 공간을 할애했다.

전시실에 고대 인도에서 신성시한 숫자인 7개의 형상이 부조된 사암 조각이 있었다. 인도의 한 사막을 여행하다 발견한 조상신 비석이다. 너무 멋져 보여 가이드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런 것 좀 구할 수 없을까’ 했는데 마을 촌장이 선뜻 팔았단다. 현지인도 자국 미술의 가치를 잘 모르던 때다. “지금은 좋은 작품 구하기 힘들다. 부족마다 개성 강하던 미술도 휴대폰이 보급되며 경계가 없어지고 상업주의도 짙어졌다”고 했다.

하루는 인도에서 박물관장을 지낸 이가 방문해 “평범한 한국의 부부가 이 정도 컬렉션을 꾸리다니, 인도 박물관보다 더 좋다”고 감탄했다. “사실 인도인들이 덕담을 잘해요(웃음). 항상 상대방을 축복해주고 좋은 이야기를 해 주죠. 젊을 땐 와닿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닮아 가더라고요. 우리보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훨씬 긍정적이고 밝은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칭찬에 인색한 우리도 보고 배웠으면 하는 점이죠.”

그는 인도를 보는 우리 시선이 ‘게으르고 가난한 나라’에서 벗어나 더 입체적이고 다채로워지면 좋겠다고 했다. 박물관은 인도 사회와 문화를 알리기 위해 인도 미술체험과 음식, 의상, 요가, 명상 등 다양한 인도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매해 가을엔 백좌흠 동문이 발족한 ‘영월인도포럼’이 박물관에서 열린다. 인도 연구자와 대사, 주재원 출신 등 전국 인도 전문가들이 영월에 모여 인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식견을 나누고 토론도 펼친다.

새해 목표를 묻자 “건강”이라고 답했다. 사립박물관을 운영하는 일이 녹록지 않지만 오래오래 관람 안내도 하고, 인도 문화를 전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3년간 못 갔던 인도 방문 계획도 세우고 있다.

“‘노 프라블럼(No Problem)’. 인도 사람들이 정말 많이 쓰는 말이에요. 차를 긁어도 ‘노 프라블럼’이라며 그냥 가래요. 처음엔 ‘또 저 소리네’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말이에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작은 일에 화내고, 돈 때문에 싸우는 게 다 부질없다는 거예요. 이걸 여러 사람이 알고 있다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질 것 같아요.” 박물관은 하절기에는 월요일, 동절기엔 월, 화 휴관한다.

문의: 033-375-2883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