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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2019년 12월] 뉴스 기획

사제가 된 동기·전쟁영웅 선배 모두 모두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다 친구야

①1962년경 윤상래 동문이 모교 동문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가운데가 윤 동문이 찾고 있는 김세창 동문, 앞줄 맨 왼쪽 윤상래 동문.

②1957년 7월, 배구 경기 중 촬영된 조도근 동문의 학창시절 모습(가운데 검은 옷차림). 오른쪽 모자 쓴 이가 조 동문이 찾고 있는 이기현 동문.

③구월환 동문이 4·19혁명을 맞았던 1960년대 동숭동 캠퍼스 전경.

④원우현 동문이 기억하는 학창시절 최대 이슈는 한일회담 반대시위였다.

⑤이봉화 동문이 의대 본과에 진입하면서 건넌 대학로 미라보 다리.



사제가 된 동기·전쟁영웅 선배 모두 모두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다 친구야


한 해가 저무는 12월. 모교를 떠올리면 재학시절 절친했던 선후배, 동기들과의 추억이 뒤따른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저마다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가 됐지만,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 때문에 바빠 혹은 유학이나 이민으로 멀어진 사이 연락이 끊긴 친구들이 있기 마련. 이에 본지는 소식이 닿지 않는 선후배, 동기를 찾는 사연을 제보받아 지면에 정리했다. 소중한 사연을 보내준 동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보고 싶은 친구들을 꼭 다시 만나길 기원한다. 제보=news@snua.or.kr

나의 음악 선생 이기현


조도근
(사회교육57-61)
인하대 명예교수

같은 과 동기 이기현 동문을 찾습니다.

저는 그의 권유로 당시 사범대 합창단 ‘COE’에 가입해 활동했었죠. 이 동문은 우리나라 가곡은 물론 독일 가곡을 비롯해 유럽의 음악 세계에 대한 조예도 깊어 저로 하여금 음악에 눈뜨게 해준 친구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명동 ‘돌체’에 들러 함께 음악을 들었고,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교양악단 지휘자였던 고 계정식 박사가 주관하는 정기 레코드 감상회에 참석해 밤늦도록 음악의 매력에 취하기도 했었죠. 제 나이 팔순을 넘기면서 운동 삼아 매일 집주변 산자락을 산책하는데, 그때마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옛 동산에 올라’ 등 이 동문한테서 배운 노래들을 읊조립니다.

이 동문이 일신여상 교사로 재직하던 1970년대 초까진 그럭저럭 연락이 닿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됐죠. 풍문에 의하면 알코올중독에 걸렸고, 왕십리 근처 주점의 어느 여인과 동거해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동기 중 누구도 정확한 소식을 모릅니다.

기현 군, 살아는 있는가.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버렸지만, 옛 용두동 캠퍼스를 군과 함께 찾아가 학창시절 같이 불렀던 노래들을 소리내어 다시 불러보고 싶네.


그리운 영태, 영보, 용석아


구월환(사회60-67)
전 세계일보 주필

같은 과 동기 김영태·현영보·신용석·김정환 동문을 찾습니다.

재학 중 군에 입대하면서 연락이 끊겼어요. 우리 과 동기들은 동숭동 캠퍼스에 입학해 개강하자마자 4·19혁명을 맞았지요. 산뜻한 교복을 입고 첫 강의를 듣고 있는데, 밖에서 빨리 나오라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심전심 모두들 가방을 챙겨 우루루 밖으로 나갔어요. 당시 이만갑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셨지요. 묵시적 동의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정권이 무너지고 경찰이 무력화되자 대학생들이 잠시나마 그 공간을 메웠습니다. 저는 서울역 앞에서 교통정리를 맡았지요. 여름방학 때는 향토계몽대에 들어가 같은 고향 출신 서울대생들과 합숙하면서 4·19의거를 설명하고 다녔어요.

어수선했지만 해가 바뀌어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5·16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이래저래 공부할 기분이 아니었죠. 1962년 제가 입대를 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이 컸습니다. 1965년 공군 만기 제대 후 복학을 하고 보니 동기생 대부분이 떠난 후였어요. 빈 둥지처럼 썰렁한 느낌이었죠. 동기생 중 6명이 고인이 됐는데 이들은 소식이나 아는지 모르겠네요. 영태야, 영보야, 용석아, 정환아. 이 글 보면 꼭 연락해다오.


신부가 된 김동기


원우현(행정61-65)
고려대 명예교수

같은 과 동기 김동기 동문을 찾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함께 공부한 김 동문은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모교 재학생들 중에서도 알아주는 공부벌레였죠. 축제는 물론 미팅 자리에도 한번 기웃거린 적이 없었습니다.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극렬했지만 흐트러짐 없이 공부하는 충실한 학생이었죠.

어느 날, 법대 모 교수의 수업을 놓고 학생들의 불만이 쏟아졌어요. 고시 준비를 하려면 명료하고 풍부한 강의를 들어야 하는데 모 교수는 독일어 원어만 길게 나열하고 요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여기저기서 성토를 했죠. 그때 김 동문이 벌떡 일어나 일갈했습니다. “당신들이 교수님 수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한 적이 있는가? 내가 강의를 꼼꼼히 적고 예습·복습해보니 이 이상 완벽한 교과서가 없었다”고 말이죠.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다른 학생들이 유기천 당시 학장을 찾아가 해당 교수의 강의를 놓고 항의했습니다. 유 학장은 그 교수가 손꼽히는 학자라며 외려 학생들을 혼쭐냈죠.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친 제가 유학을 떠나면서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저는 그가 청백리 소리 듣는 공무원이 될 줄 알았는데, 웬걸요. 1973년 귀국 후 천주교 신자인 주광일(법학61-65) 동문으로부터 김동기 동문이 신부 서품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태원 근처 성당에서 오랜만에 만난 그는 여느 신도들과 똑같이 제게도 짧게 축원 기도를 하고 지나쳤지요. 그런 그가 지난 5월 모친상을 당한 제게 전화를 줬어요. ‘어머님 하늘나라 가시는 길에 기도를 해 드려도 되겠나’ 물었죠. 경황이 없어 연락처도 못 받아놨던 게 가슴 깊이 사무칩니다.


세창이 형 살아계시죠?


윤상래(수의학62-66)
전 미주동창회장

농생물학과 60학번 김세창 선배를 찾습니다.

세창이 형은 저의 출신 고등학교인 청주고 선배이기도 해서 모교 재학시절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2학년 1학기 땐 선배가 묵으시던 월세방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어요. 선배와 저의 인연은 군 복무 시절에도 끊이지 않았죠. 제가 ROTC 4기로 임관해 광주에서 훈련을 받을 때, 먼저 해병대 장교로 임관했던 선배가 병과를 바꾸셔서 광주 훈련소에 오셨거든요. 훈련을 마친 선배는 곧 월남으로 파병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베트남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짜빈동 전투’에 참전, 포병 사격을 지휘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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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월맹, 북베트남군 제2사단 제1연대 제60대대와 제21연대 제40대대, 쾅나이성 게릴라 1개 대대 등 2400여 명의 병력이 한국 해병대 1개 중대(294명)를 공격한 데서 시작됐는데, 아군도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희생을 치렀지만 적 확인사살 243명, 추정사살 60명, 포로 2명, 체코제 화염방사기 3문, 대전차 유탄발사기 5문, 기관총 2정, M15소총 11정, M56자동소총 17정, 각종 실탄 6000여 발, TNT 100개, 탄창 52개, 기관단총 7정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밤새도록 싸우고 날이 밝을 무렵, 적 후방을 살피기 위해 몸을 일으킨 선배는 그 순간 베트공 저격병의 총알을 맞고 철모가 뚫리는 총상을 입었습니다. 의식을 잃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김세창 중위를 동료 소대장이 발견, 후송을 하여 기적적으로 살아나셨죠. 제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 댁으로 찾아뵈면서 구멍 뚫린 철모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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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우연히 유튜브 같은 채널에서 청룡부대의 짜빈동 전투 기념식 동영상을 시청하게 됐습니다. 영상 속엔 김세창 선배도 있었죠. 1972년 미국에 온 저는 3년 동안 동물약품 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임상 수의사로 전공을 바꿔 1977년 애완용 소동물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2017년 은퇴를 했고 그 무렵 미주동창회장도 역임했지요. 세창이 형과 만나 이렇듯 제 소식도 전하고,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싶네요. 형이 미국에 오시면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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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 회원정보 확인 결과, 김세창 동문은 2018년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미국 간 김자억 동기


이봉화(의학69-75)
한림대 성심병원 교수

같은 과 동기 김자억 동문을 찾습니다.

1971년 의대 동기생 120명이 ‘미라보 다리’를 건너 동숭동에서 연건동으로 옮겨 왔습니다. 1969년 의예과 입학 당시엔 160명이었으니 40명이 낙제를 한 셈이죠. 모교병원 본관 신축공사로 인해 몹시 시끄러운 신입생 진입식을 치른 기억이 나네요. 그때부터 혹독한 공부가 시작됐습니다. 낮에는 하루 종일 수업이 있었고 밤에는 의과대학 본관에 마련된 옥상 도서실에서 공부했어요. 수업시간에 미처 받아 적지 못한 노트를 서로 돌려가면서 보완하고 공부하다 밤 10시가 돼서야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의 반복이었죠.

공부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어서 수업내용을 일일이 섭렵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주말마다 혹은 2주나 4주마다 시험이 반복되므로 시간이 항상 빠듯했죠. 선배들한테서 내려오는 소위 ‘족보’를 구하려고 함께 노력했어요. 간혹 ‘탈족보’라고 해서 시험이 기출문제와 다르게 출제되면 성적들이 곤두박질쳤죠. 특히 통합강의는 거의 모든 학생이 재시험을 봤고, 그래도 안 되면 다시 재시험 즉 삼시를 거쳐 겨우 학점을 벌었어요. 의대는 학년제여서 한 과목이라도 학점을 못 받으면 바로 유급판정을 받았습니다. 기초과정 2년, 임상과정 2년을 마치고 1975년 졸업생 명단을 확인해보니, 의예과 입학 당시의 절반도 안 됐습니다. 두 명 가운데 한 명만 제대로 졸업을 한 셈이죠. 우수하고 착실한데도 마음이 약한 친구들은 혹독한 시험을 견디지 못하거나 스트레스를 못 이겨 중도에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험난한 학창시절에도 기죽지 않고 늠름한, 키가 훤칠하고 교회 성가대 활동도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자억 동문이었습니다. 도서실 문 닫는 시간에 맞춰 막걸리를 사와 동기들에게 돌리기도 하고, 사교성이 부족한 제겐 형제처럼 친근하게 말도 걸어줬죠.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버지니아 주에 살고 있다는 데 연락이 닿지 않네요. 졸업 45주년을 코앞에 둔 지금 그 친구가 몹시 그립습니다.


히식스 잘 불렀던 김국희


강창훈
(기계공학74-78)
행복한요양병원 원장

약학과 74학번 김국희 동문을 찾습니다.

국희와 저는 교양과정부 같은 반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모교에 입학하면 1학년 땐 전공과 관계 없이 국어 영어 수학 화학 물리 등 일반 교양과목을 이수해야 했죠. 서울이나 대도시 소재의 고등학교 출신들은 입학 전부터 아는 동기들이 많았지만 저처럼 지방 소도시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거의 외톨이였지요. 과외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힘들었고요. 그때 국희 덕분에 좋은 조건의 그룹과외를 구했고 같이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친해졌습니다. 저는 수학을, 국희는 영어를 주로 가르쳤죠.

과외 아르바이트했던 집이 국희네 집과 가깝다 보니 국희의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냈어요. 과외받는 학생 집에서 수업이 어려울 땐 국희네 집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고요. 저와 국희를 비롯해 섬유공학과 이영길, 화학공학과 박장진, 미생물학과 안태영, 항공공학 조성두 등이 의기투합해 함께 어울려 다녔습니다. 모임의 일원임을 의미하는 은반지까지 만들어 끼고 다녔어요. 그냥 젊은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그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기분에 취해 있었죠.

학창시절 그렇게 친했는데, 국희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에는 한두 번인가 편지를 받았던 것 외에 다른 연락은 없었습니다. 국희가 ‘히식스’(He6)의 ‘당신은 몰라’라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오늘따라 듣고 싶네요. 저는 모교 졸업 후 ROTC 장교로 임관, 군 복무를 마쳤고 기아자동차에서 10년 간 근무했습니다. 이후 42살 나이에 한의대에 입학해 7년간 공부했고, 지금은 충남 논산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어요. 동문 인명록에 있는 미국 주소로 몇 번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네요. 내 친구 국희를 찾아주세요.


지현 선배의 너그러운 웃음


동용국
(보대원92-94)
대신대 교수

보건대학원 지 현(보건관리85-87) 선배를 찾습니다.

모교 보건대학원 입학 전 저는 세 아이와 아내를 둔 다섯 식구의 가장이었습니다. 대형 입시학원에서 잘 나가던 스타 강사였죠. 학부 졸업 10년 만에 업으로 가르치던 수학과는 전혀 다른 보건학을 시작하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식구들이 대구에 있어 매주 서울을 오르내려야 했고, 수입이 중단된 데 따른 고통 또한 견디기 어려웠죠.

어찌어찌하여 첫 학기가 끝날 무렵, 당시 동기생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무의촌 하계실습을 떠났습니다. 강원도 오지 산골인 춘성군 동산면의 차도 못 들어가는 벽촌에서 열흘을 지냈어요. 주민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며 건강실태 파악에 나섰죠. 뙤약볕 아래 하루에도 몇 개씩 산을 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실습 마지막날 제출하는 최종 보고서가 통과되지 않으면 집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는 도무지 통계분석을 할 수 없었어요. 대상 가구 수도 워낙 적었고 집을 찾아간들 주민들은 밭에 나가 있기 일쑤여서 만나는 것조차 힘들었죠. 깨끗이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절망이 엄습해왔습니다.

그때 구세주처럼 지 현 선배가 나타났어요. 보건통계학 교실의 조교였던 선배는 우리의 난감한 상황을 꿰뚫고 있었죠. 새벽길을 달려온 선배는 실습지역이 지닌 지리적 취약점과 대상 가구의 특성을 토대로 조사대상 수가 적을 때 적용 가능한 통계 분석기법을 오전 내내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배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저의 절망과 포기도 씻겨 내려갔지요.

드디어 조별 발표시간, 최고령(?)이란 이유로 조장이 된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 내내 교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주저앉을 뻔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조교석에 앉아 살짝살짝 응원의 눈길을 보내주시던 지 선배 덕분에 솔직하게 연구의 한계점을 토로했고, 부족한 지식은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하자 교수님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외롭고 고단한 만학의 길에서 만난 지 현 선배의 그 너그러운 웃음이 몹시 그립습니다.
정리=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