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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호 2019년 9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어떤 장학금에 대한 기억

강경희 조선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관악춘추

어떤 장학금에 대한 기억


강경희
외교84-88
조선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지난해 우산육영회로부터 창립 50주년 행사를 치른다는 연락을 받았다. 1988년 대학원에 진학해 우산육영회 장학생으로 선정됐다. 우산육영회는 1960년대 당시 장안에 유명했던 요리집 ‘청운각’을 운영한 우산 조차임 여사의 호를 딴 장학재단이다. 1905년생 고인은 해방 이후 상경해 가사 도우미, 국밥집, 한식당을 하면서 어렵게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고급 요리집 청운각을 차렸고, 세상 떠나기 전 청운각을 정리한 돈으로 장학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1968년 12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우산육영회가 출범했다. 우산육영회는 성적 우수하고 가정 형편 어려운 서울대 대학원생들에게 50년간 장학금을 지급해 500여 명의 인재를 길러내는 알찬 밀알이 됐다. 오랫동안 순수 학문 분야를 지원한 덕에 서울대 교수만 수십명 넘게 배출했다.

내게 그 장학금의 고마움은 비단 물질적 보탬만이 아니었다. 학업을 이어가기 힘들 만큼 집안 형편이 기울었을 때였는데, 힘겹던 삶에 세상이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 듯한 심리적 위안이 컸다. 그게 마음 빚으로 남아 있다. 설립 40주년 행사 때는 해외 특파원으로 나가 있어 연락이 닿질 않다 50주년 행사에 소식 접하고는 새삼 뭉클한 기억을 떠올리며 작게나마 성의를 보탰다. 우산육영회는 장학생 출신들이 십시일반 장학금을 모아 기부하는 ‘장학금 대물림’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장학금이란 그렇게 고귀한 가치를 확대 생산하는 돈으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 한 장학금 논란을 보고는 말문이 막혔다. 조 국 법무부 장관의 딸이 신청한 일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서울대 총동창회 산하 장학재단이 지급했다는 그 이상한 장학금 얘기다. 여행지 기념품 모으듯 서울대 환경대학원 스펙 하나 챙긴 뒤 몇 달 안돼 더 좋은 스펙으로 튀어버린 학생에게 두 학기 연속 장학금을 준 사실도 괴이하고, 도움이 절실한 학생에게 가야 할 장학금이 이리 허투루 쓰인다는 사실도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장학금 ‘먹튀’한 측의 얌체 심보도 괘씸하지만, 장학금을 부실 지급한 책임도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지향하는 가치도 없이 장학금이 마구잡이로 지원되고 사후 관리도 제대로 안 되는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조 국 딸 장학금 때문에 서울대에 항의전화가 많이 걸려왔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총동창회 자유게시판에도 ‘이런 작태를 보면 동창 중 누가 선의를 가지고 선뜻 동창회비 납부, 장학금 기부를 생각하겠습니까’라고 질책하는 글이 떠 있다. 이 불미스러운 장학금 논란을 계기로 총동창회도 장학금 지급이나 각종 활동에서 더 투명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운영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