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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호 2019년 7월] 기고 에세이

동숭로에서: 회색에 대하여

윤재윤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수필가



윤재윤

법학71-75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수필가





유대사회의 전통 법정인 산헤드린에는 독특한 규칙이 있었다. 형사재판에서 재판관들의 의견이 사형에 만장일치가 되면 오히려 사형판결을 선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상 23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법정에서 극형을 선택하는 것에 한 사람의 이견도 없다면 피고인의 변호가 불충실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것 같지만, 이 규칙에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깔려 있다. 인간은 워낙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대한 결정을 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이 산헤드린에서 재판받았다면 이 규칙 때문에 사형을 면하였을 가능성도 있다(실제로 이스라엘 건국 초에 산헤드린을 정식 법정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다).



우리의 재판과정을 살펴보아도 위 규칙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판결은 결코 흑백의 구분처럼 명쾌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실관계가 복잡하고 쌍방의 주장이 다를 때 사건의 실체를 판단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런 사건에서 한쪽의 일방적 잘못만 있는 경우는 많지 않고, 양쪽 모두에게 실수와 오해가 있기 마련이며, 인과관계가 모호하게 얽혀 있다. 판결의 주문은 승패가 명쾌하게 표시되지만, 실체는 양자의 책임이 60대40 심지어는 51대49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법관과 변호사로서 40년 가까이 재판업무에 관여해 오면서 재판이 얼마나 실체와 거리가 멀 수 있는지 절감하고 있다. 법정에서 자신만만하게 말을 하는 재판장을 보면 저런 마음으로 어떻게 옳은 판결을 할지 걱정이 된다. 재판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인간은 부족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고, 인간사는 흑백이 아니라 회색의 세계에 속한다는 점이다. 산헤드린은 3,000년 전에 이미 이를 꿰뚫어 본 것이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나는 요즘 사회적 이슈에 관한 판결이 선고될 때마다 깊은 절망감을 느끼곤 한다. 판결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판결 선고 즉시 불만을 가진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재판부를 공격한다. 정치인부터 앞장서서 떠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치한 절차를 거쳐 선고된 판결에 대하여 이럴진대, 다른 일에 대하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사가 흑백이 아니라, 회색의 차원이 본질적이라는 것을 도무지 생각하지 못한다. 고대 유대사회만도 못한 우리들 아닌가.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이완용의 전기를 읽으면서 “인간은 매우 착잡한 존재이다. -한 인간을 그 겉을 벗기고 안을 들여다보면 결코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할 수 없는 숱한 복합, 이종, 변형 또는 나아가 형용모순의 수식이 필요한 경우로 범벅된다”고 토로한다(본질과 현상 2019. 봄호). 이완용의 알려지지 않은 뜻밖의 선한 행적에 당혹감을 느꼈으며, 이를 통하여 일차원적 사유만으로 인간을 난도질하는 태도의 위험성을 깨닫고, 인간 이해에 좀 더 부드럽고 여유를 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인간의 회색차원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아닐까?



우리 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흑백의 차원을 벗어나기는커녕, 원색적 대립이 더 심해지고 있다.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고 반대의견을 배척하는 사회는 결코 변화할 수 없다. 흑백의 세계는 무지와 퇴보의 세계임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회색은 모든 색 중에서 가장 특징이 없다. 무엇보다도 회색은 모호하고 선명하지 못하며, 불안정하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이를 받아들이고 견디어 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회색은 흑과 백이 어울려야 나오는 조화와 변화의 색이다. 회색은 겸손의 색이자, 성찰과 지혜의 색이다. 회색은 소란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에게 “조용히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윤 동문은 여러 권의 수필집을 내며 따뜻한 글을 쓰는 '휴머니즘 법조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직 판사 시절 에세이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내고, 변호사 개업 이후에도 60여 편의 에세이를 모아 '소소소, 진짜 나로 사는 기쁨' 등을 펴냈다. 단정하고 담담한 문체에 법조인으로 인간과 자신을 깊이 성찰한 시각이 담겨 애독자가 많다.


제21회 사법시험 합격 후 30여 년간 판사로 봉직했다. 서울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춘천지방법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에서 건설전문재판부 재판장을 최장기간 역임했다. 지금은 법무법인 세종의 파트너 변호사로 건설·부동산 분쟁, 기업 및 화이트 칼라 관련 형사 소송, 가사 소송 등을 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