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호 2019년 6월] 기고 에세이
동숭로에서: 59학번의 관악 벚꽃구경
김만옥 소설가
59학번의 관악 벚꽃구경
김만옥
국문59-63
소설가
문리대 59학번 여학생들이었던 우리는 해마다 봄 가을에 한 차례씩 관악산 서울대를 방문한다. 봄에는 벚꽃 구경, 가을에는 단풍 구경한다는 핑계로.
이른 오후에 노천광장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작은 인공폭포가 있는 인문동 뒷길을 걸어 자하연 옆 나무 계단을 내려가 박물관 방향으로 가는 척하다가 정작 박물관으로는 가지 않고 언덕길 위에 있는 예술대학 입구의 카페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산책 코스다.짧은 산책로이지만 봄에는 꽤 여러 차례 벚꽃을 만나 호들갑을 떨고 가을에는 단풍에 충분히 감탄할 수 있다.
그런데 금년 봄에는 서울대 가까이 사는 나 혼자 벚꽃 구경을 갔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여의도나 동부이촌동이나 강남 아파트에서 하는 동네 벚꽃 구경이 서울대 벚꽃 구경만 하겠냐 하면서 나는 속으로 약간 삐지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 하는 꽃구경이 여럿이 같이 하는 꽃구경만 하지 않았다. 뭔가 썰렁하고 지루하고 무덤덤 했다 할까.여럿이 갔을 때 그토록 많던 벚꽃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친구들과 함께 걷던 그 산책로와 똑같은 산책로를 왕복했는데 말이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그러고 보니 여럿이 함께 산책을 할 때는 꽃구경 하는 것도 좋았지만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하면서 어느 한 친구가 ‘우리 59학번이에요’ 하면 ‘그런 학번도 있어요?’ 하는 듯 깜짝 놀라는 젊은이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더 쏠쏠했던 모양이다. 아마 그 놀라는 표정의 의미는 ‘그런 학번 할머니들도 있어요?’였을 것이다. 그 학번의 할아버지들은 많을 테니까.
우리는 59학번이란 명칭을 쓰지 않는 세대다. 단기 사천이백구십이년 입학생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젊은이들 흉내를 내어 59학번이라 했다. 꽤 간편하고 재미있다.
사진 찍기와 커피 마시면서 담소하는 시간이 없어진 나 혼자만의 산책은 그래서 더 별로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59학번 들먹이며 사진 찍기보다 산책 후의 담소가 진짜 목적이었는지 모른다. 반세기 넘게 매달 한 번씩 만나 식사하고 담소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으니까.
그 담소 중에 매번 빠지지 않는 화제가 있다.
“우리가 관악산 캠퍼스를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거니?”
서울대를 관악산으로 이전하는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우리들, 바로 문리대 59학번 아주머니들이(그땐 거의 자식 두엇 딸린 아주머니들이었다) 기를 쓰고 반대 캠페인을 벌였던 그 일을 떠올리며 누군가가 말을 꺼내는 것이다.
“지금 관악산 캠퍼스를 좋아하는 우리 꼴이 약간 무안하긴 하지. 그래도 그때 우리가 그 난리를 치지 않았으면 동숭동이 대학로라는 이름을 달고 지금의 모습으로라도 남아났겠니? 우리가 반대하기 전 원래 대한주택공사의 계획안대로 했다면 지금의 마로니에 광장까지 주택이나 아파트로 꽉 찼을 거야. 처음에는 겁도 없이 관악산 이전 자체를 원천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하는 짓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깨닫고 슬그머니 방향을 변경했잖아. 넓은 관악산으로 이전하고 흩어진 단과대학들을 합치는 건 찬성하지만 본부가 있는 동숭동은 지금의 모습대로 보존해달라는 하소연으로 말야.”
새삼 재미있어 하며 한바탕 웃는 것으로 그 대화는 끝난다. 문리대 59학번 여학생들의 진면목은 뭐니뭐니 해도 1960년 4월 19일 한국 최초의 여학생 시위대열을 이룬 주인공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올 가을에는 나 혼자 말고 다같이 단풍구경을 가자고 권할 작정이다. 그럴 때 꼭 하게 되는 말 ‘내년에는 못 볼지 모르니까’를 붙이겠지. 속으로는 이러다 오래 살면 좀 무안해질 텐데 하면서.
*김 동문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순례기'가 당선돼 1977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4ㆍ19혁명의 원체험을 안고 개인 속에 각인된 역사의 모순과 고통의 근원을 탐구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소설집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 '그 말 한마디', '베어지지 않는 나무', 장편소설 '계단과 날개' '결혼 실험실' 파리에 머물며 쓴 글을 엮은 에세이집 '내 생애 최고의 날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