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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2019년 3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고령화 시대의 생태학

이도원 전 모교 환경대학원 교수 칼럼
고령화 시대의 생태학



이도원
식물71-78
전 모교 환경대학원 교수
생태학자


노인들의 오랜 경험과 지혜가
사회에 공헌하는 길 찾아내야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어떤 연령에 이른 노인과 함께 얼마 동안 먹을 식량을 외진 곳에 두고 오는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지고 고려장을 하려간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도 데리고 갔더란다. 할아버지를 남겨놓고 오던 손자가 지게를 챙겼다. 아버지는 의아해서 물었다. “그 지게를 왜 가져 오냐?” “나중에 아버지를 지고 갈 때 써야지요.” 당신의 차례가 기필코 올 것이라는 사실에 아버지는 더럭 겁이 났다.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를 다시 모셔오고 고려장 풍습은 사라졌다. 어릴 적에 사랑방에서 어른들 사이에서 엿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다.

1898년 가을 러시아인 가린-미라일로프스키가 채록하고 안상훈이 옮긴 ‘조선설화’에도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내용이 있다. 러시아의 수집가는 이 이야기를 중국민담이라 밝혀놓고는 무슨 까닭인지 그 책에 넣어두었다. 60세가 되기 전의 노인을 죽이던 시절에도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늙은 아버지를 움막에 숨겨놓고 봉양했다. 그러던 어느 해 암소만 한 크기이며 요상한 쥐 형상의 짐승이 궁궐을 습격했다. 아무도 막아낼 방책을 내어놓지 못할 때 움막의 노인이 아들을 통해 황제를 구할 지혜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황제는 노인 살해의 악습을 없애도록 했다.

구체적인 노인의 지혜를 밝힌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중국을 대국으로 받들던 때의 일이다. 어느 해 중국에서 충분히 자라 구분이 어려운 새끼 소와 어미 소를 보내며 그중에서 어미 소를 밝혀내지 못하면 쳐들어오겠다는 트집을 잡았다. 조정 대신들은 머리를 짜내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느 집안의 딸이 숨기며 모시던 모친께 그 이야기를 했다. “두 소를 오래 굶긴 다음 먹이를 주거라. 먼저 먹는 소는 어미다.” 그 덕분에 난관을 극복한 이후부터 나라에서는 고려장을 금지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일제 때 왜곡된 이야기라는 지적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역사가에 맡기고 생각해볼 거리를 챙겨서 나쁠 것이 없다. 이를테면 마지막 이야기에는 어미 소와 새끼 소의 관계를 장유유서의 도덕으로 꾸민 노년의 지혜가 들어 있다. 덕분에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와 ‘문명의 붕괴(Collapse)’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전작 ‘제3의 침팬지(The Third Chimpanzee)’의 내용도 생각난다. 다른 생물들은 보통 생식기능이 마감되면 수명도 끝나는데 사람은 더 오래 사는 까닭은 뭘까? 그는 유전자 논리로 설명한다. 어머니들은 2세가 충분히 자라도록 돌봐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에 폐경기가 지난 다음에도 삶을 이어 할머니가 된다. 할아버지도 지식 전수자로서 2세와 종족 유지를 위해 생식능력이 마감한 다음에도 오래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이런 인간 특유의 현상은 유전자가 세세손손 이어가는 생존전략의 결과다. 다이아몬드의 글에서 한국과 일본, 중국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유전자 논리를 우리 민담에서 착안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문명의 궁궐을 위협할 고령화시대라는 괴물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압박이 강해지면 오래된 고려장 심리가 인간 문화의 밈(meme)으로 다시 발현될지도 모른다. 예방하자면 노인들의 오랜 경험과 지혜를 낭비하지 않고 사회에 공헌하는 길을 찾는 일이 절실하다. 더욱이 내가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저 따라야만 하는 윤리 의식을 넘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할 장치를 갖춘 사회가 선택될 가능성이 높다. 어미 소를 찾아낸 늙은 어미의 지혜처럼 말이다. 바로 지금이 고려장시킨 전통지식을 다시 찾아와야 할 때다. 같은 맥락해서 현대생태학이 노인의 지혜를 빌릴 수 있는 곳은 바로 전통생태학이라는 창고가 아닐까?





*이 동문은 글 쓰는 생태학자다. 모교에서 식물과학 이학사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환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교 환경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전통 마을숲의 생태계 서비스' '전통마을 경관요소들의 생태적 의미' '한국 옛 경관 속의 생태지혜', '경관생태학', '떠도는 생태학', '보전생물학', '생태학: 과학과 사회를 잇는 다리' 등이 있다.  

생태적인 전통을 복원하는 데 관심을 두고 우리 땅의 물과 숲을 찾아다닌 생태 에세이 '흐르는 강물 따라'를 냈으며, 생태학자의 눈으로 비단길을 여행하고 에세이 '관경하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