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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호 2024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와인과 함께 꿈꾸는 인생 2막

홍지영 SBS 선임기자·본지 논설위원

와인과 함께 꿈꾸는 인생 2막



홍지영
(식품영양87-91·불문89-93)
SBS 선임기자·본지 논설위원


은퇴 후 대비한 와인 공부 1년
재밌게 열심히 배워 성과 기대


학창 시절 시험 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했던 이른바 ‘벼락치기’라는 걸 최근에 다시 하게 됐다. 프랑스 와인 시험 전날이었다. 암기할 건 많은데 공부는 못했고, 하는 수 없이 입으로 중얼거리며 외우다 보니 어느새 밤이 가버린 거다. 시험을 보러 갔더니 글자는 어른거리고, 머리는 띵하고. 이제는 밤을 새며 공부할 나이가 아니라는 걸 실감했지만 한 단계를 또 넘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와인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1년쯤 전이다. 그동안 와인 전문가 과정 1·2·3단계를 차례로 통과했고, 내친김에 별도 과정인 ‘프랑스 와인’에도 도전하게 됐다.

파리 특파원을 마치던 지난 2007년, 은퇴 후에는 프랑스에 다시 와서 와인 공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돌아왔다. 유학 생활도 없었고, 연수도 없이, 덜컥 특파원 발령을 받고 어린(?) 나이에 부임해, 일만 하다가 올 때가 되니 아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은퇴가 가까워지면서 기자 생활을 그만두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따볼까?’

K-POP 인기에 힘입어 한국어를 배우려는 프랑스 청소년들이 수강 신청 전쟁을 벌인다는데, 불문학을 전공하고 글쓰기, 말하기로 30년 넘게 밥벌이를 했으니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어를 잘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신문 방송 대학원까지 했으니 내친김에 박사 과정까지 해볼까?’

그러다가 와인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너무나 배우고 싶었다. 굳이 프랑스에 가지 않아도, 굳이 은퇴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찾아보니 영국에 본원을 두고 있는 세계적인 와인 교육 기관의 자격증 코스가 한국에도 개설돼 있었다. 소믈리에 과정과 와인 전문가 과정으로 나뉘는데, 나는 와인 전문가 과정을 선택했다. 소믈리에는 와인 서비스 등 실무 위주의 교육에 치우치고, 와인 전문가 과정은 이론에 치우친다는 설명을 들었다. 1·2단계는 애호가지만, 3단계를 통과하면 전문가로 인정해 준다.

나라마다 다른 포도 품종들의 특성을 다 이해하고 암기해야 하고, 지형과 기후, 토양, 양조법 역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암기가 대부분이다. 체력은 예전 같지 않고, 돌아서면 까먹는 나이에 새로운 것을 암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특파원 시절 장보러 갈 때마다 와인 코너를 기웃거리며 그날 먹을 와인을 사는 데 시간을 쓰고, 라벨을 보며 연구하고 마셔봤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데다가, 파리에서 일하면서 프랑스 각지의 지형과 기후가 익숙해진 기반 위에서 공부를 시작하니 가능했던 것 같다.

은퇴를 앞두고 어디서 ‘한달 살기’를 할지 찾아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 경우는 당연히 와이너리 근처가 될 거 같다. 와인과 프랑스와 관련된 책도 쓰고 싶다. 단순히 와인에 대한 설명과 음식과 매칭을 설명하는 책을 넘어선 접근을 해보고 싶다. 로마인과 프랑크족, 백년 전쟁, 나폴레옹 법전은 어떻게 프랑스 와인 산업에 영향을 미쳤는지, 부르고뉴와 보르도가 어떻게 다른 형태로 와인 산업이 발달했는지 등등 유럽의 모든 것이 와인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국내에 와인 전문가들은 많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발을 내딛은 사람들도 많다. 와인 수업을 들으러 가보면 입시학원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젊은 친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앉아 있다. 그러나 방송 기자로 글쓰기, 말하기 훈련을 잘해 왔고, 파리 특파원을 하면서 유럽에 대한 이해를 키워온 데서 차별화할 수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재미있게 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인생 2막에서도 ‘뭔가’ 이룰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