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호 2024년 9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나의 성공을 위한 10가지 조건
김승련 (국제경제87-92) 동아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느티나무 광장
나의 성공을 위한 10가지 조건
김승련
(국제경제87-92)
동아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학벌이 모든 조건 보증하지 않아
지필고사 치우친 평가 개선돼야
서울대를 졸업했기에 프리미엄이라는 것을 누리며 살았다고 느낀다. 동문께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 같다. 하지만 그 프리미엄은 우리를 학벌사회로 묶어둔다고 여겨질 때가 많았다. 동문께서는 어떠셨을지 모르겠다. 감히 말하자면, 이런 호사는 줄어들었으면 한다.
하나의 직장인으로만 국한해 보자. 성공을 위해 필수 역량에 어떤 게 있을까. 10개쯤 고를 수 있겠다. ①현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 ②그렇게 얻은 이해를 더 오래, 더 정확히 기억하는 능력 ③주어진 마감 시간을 지키는 집중력 ④그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책상 떠나길 거부하는 인내력이 먼저 떠오른다.
서울대 입학은 지필고사를 잘 치렀다는 의미고, 위에 열거한 ①~④ 역량을 갖췄다는 뜻이겠다. 그럼에도 세상에 나와 일해 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중간간부 지위에 이르는 마흔 살 전후로는 아래의 필요성을 더 절감한다. ⑤동료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할 줄 아는 공감 능력 ⑥때론 내가 더 일하되 평가는 함께 받는,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 협업 능력 ⑦팀원들 가운데 누가 어떤 일에 더 적임인지 가려내는 리더십 안목 ⑧후배를 적절히 칭찬하고, 때론 눈물 쏙 빼게 꾸짖어 분발을 이끌어 내는 능력 ⑨상사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 말하는 처신(심지어 상사에게 적절히 아부하는 노하우)이 우선 떠오른다. ⑩번째는 독자의 개별 경험에 맡기겠다.
70년대 본고사, 80년대 학력고사, 90년대 이후 수능시험은 위 역량 가운데 ①~④를 평가하는 쪽이었다. 사지선다 시험으로는 ⑤~⑨를 가려낼 수 없다. 그러니 서울대 입학의 의미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겠다. 프로페셔널로 성공하기 위한 필요최소한에서만 상대적으로 뛰어났다는 뜻 아닐까.
이런 주장을 펴는 학자를 워싱턴 특파원 시절 만난 적이 있다. 스탠퍼드대 미술대학원인 D-스쿨에서 창의력을 가르치는 래리 라이퍼(Leifer) 교수다. 그는 인간이 정보를 흡수하는 방식을 2가지로 나눴다. ㉮칠판 강의 듣기 혹은 출판된 책 읽기, ㉯친구들이 모여 앉아 어제 본 TV 드라마를 웃고 떠들며 복기하듯 대화하기다. 전자가 일방향 정보 전달이라면, 후자는 쌍방향 정보공유다. 라이퍼 교수는 내게 “정보습득에 있어 한쪽 방식이 더 낫달 게 없다. 50 대 50이다. 학자들 사이에선 검증이 끝난 이야기니까 토 달지 말라고 들어달라”고 했다.
라이퍼 교수의 주장은 우리네 ‘낡은 교육’이 일부 학생에게 부당한 혜택을, 동시에 대다수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육제도는 일방통행식인 ㉮에 능숙할 때 공부 잘하고, 우수한 학생이라고 평가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①~④ 역량이 뛰어나다는 의미겠다. 그 바람에 소수의 학생만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박사가 되고, 의사 변호사 자격증을 딴다.
지필고사에는 약해도 ㉯처럼 쌍방향 지식 흡수 능력이 좋은 학생들은 저평가되기 십상이다. 또 우리의 객관식 수능시험을 통해 ⑤~⑨ 능력을 평가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후자에 우수한 학생들은 부당하게도 ‘나는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패배감을 지니며 살게 될 수 있다. 주변에서 보게 되는 어릴 때 공부 못했던 친구의 오늘날 성공은 우연이 아니라 이유 있는 일이 된다.
지금의 제도 아래 뛰어났던 누군가의 자질과 노력은 응당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필고사에 치우친 평가제도 아래 시험을 잘 보는 것을 놓고 전인격적 역량 소유로 오해할 필요도 없다. 87년 입학 이후 37년이 흘렀건만, 여전한 입시 만능주의는 우리가 멈춰서 있다는 뜻 같아 착잡하다. 새로운 제도와 인식이 모색됐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전자에 능했던 동문들께서 후자를 온당하게 평가하는 무언가를 만든다면 더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