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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호 2018년 10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무한경쟁 시대의 불안한 청춘

홍석경 모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무한경쟁 시대의 불안한 청춘



홍석경
불문81-85
모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나는 89년에 유학을 떠나 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2013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한국에서 일도 했으니 계산해 보면 만 18년 동안 외국생활을 한 셈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긴 시간이고, 특히 사회변화 속도가 빠른 한국사회의 경우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내가 다시 돌아온 2013년 이후의 한국사회는 89년 유학을 떠났을 때 두고 갔던, 긴 민주화항쟁으로 피곤했음에도 미래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있던 사회도 아니고, 99년 한국의 직장을 두고 프랑스의 교수직을 향해 다시 떠났을 때 기억하는 한국사회, 즉 IMF를 뜨거운 국민국가의 힘으로 이겨낸 도약하는 한국과 아주 달랐다.

다시 돌아와서 본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삶이 그 변화를 감지하는 피부 역할을 해주었다. 해외 교환학생, 장학금과 인턴십 등 대학이 주는 선택권과 형식적인 교육의 질은 많이 성장했지만, 학생들은 우리 때보다 자유롭거나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사회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 여파가 대학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쳐, 학생들은 놀라울 만큼 학점에 신경을 쓰고, 대학 저학년에서부터 졸업 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NEET에 속하지 않으려는 노력, 즉 학교나 직장에 속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이 무서운 단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학생들은 가능한 학교에 오래 머물다가 취업이 확실할 때에야 졸업을 선택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이러한 청춘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웠다. 서울대 입학에 성공한 엘리트청년들이 이럴진대, 다른 대학, 다른 도시의 청춘들에게 얼마나 더 이 위기감이 클 것인가는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이처럼 불안한 삶 속 청년세대의 연애가 편안히 이루어질 리가 없다. 수없이 주변의 이성들과 ‘썸’만을 타고 실제 애인은 없는, 기형적인 남녀관계가 일반화되고 있는 듯했다. 썸과 연애는 무엇이 다를까? 이 주제로 석사논문까지 지도하면서 청년세대가 맺는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해 알고 싶었다. 우리사회가 지닌 여러 문제가 어떻게 가장 깊숙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바로 청년세대의 연애습관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구 결과 놀랍게도 썸남, 썸녀와 애인을 가르는 경계선은 썸 관계의 두 사람, 그리고 주변의 지인에게 두 사람이 애인으로 사귄다는 것이 공지된 사이인지 아닌지의 차이일 뿐, 썸 관계와 연인관계의 프로그램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썸 관계에서도 연인관계에서 할 수 있다고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모든 연애의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실증적 증거들이 수집되었다.

서로가 애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이에서 여러 파트너에게 감정 또한 분산투자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유일한 연애를 여러 개의 썸이 대체한 오늘의 현실이다.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의 집중이 필요한 연애를 한 상대에게 몰입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실연의 슬픔조차 감정투자의 실패로 간주하는 새로운 관계의 경제가 아닐 수 없다. 여러 사람과 썸 관계를 맺으면, 이별은 다른 썸으로 대체가능하고 그로 인한 상실의 고통도 작아 빨리 아물 수 있으니, 그야말로 감정의 분산투자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청년들의 미래에 결혼의 ‘적령’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혼 자체가 필수가 아님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보인다. 이 상황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결혼만큼이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이러한 세대를 향해서 정부가 내놓은 출산장려정책은 참으로 구태의연한 것이었다. 아이를 많이 낳도록 일찍 졸업하고 결혼할 것을 독려한다거나, 아동수당 지불 정도가 해법으로 제시되었다. 청년들이 겪는 불안의 핵심적 원인인 직업과 주거의 안정, 이어서 직업과 육아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육아의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떤 정책도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해법에서 결혼은 사실 필수조건이 아닐 수도 있다. 한국사회가 서서히 이 해법을 생각해야 할 때다.



*홍 동문은 모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후 동 대학교 신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프랑스 그르노블대에서 언론정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방송위원회에서 선임연구원에 이어 보르도 3대학 언론정보학과 부교수로 재직하다 2013년 모교 언론정보학과에 부임했다. 방송, 영상문화와 현대 사회 현실구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방송형식(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드라마)과 재현에 대해 폭넓게 연구하고 있다. 세계 속의 한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며 중앙일보 '홍석경의 한류탐사' 등 기고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