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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호 2018년 10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트럼프의 新질서

김창균 논설위원 칼럼
관악춘추

트럼프의 新질서

김창균
경제80-84
조선일보 논설주간
본지 논설위원

중·고등학생 시절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조회 시간을 위해 운동장에 쏟아져 나왔다. 체육 선생님이 단상 정면 맨 앞줄 학생을 가리키면 그 학생이 큰 목소리로 “기준”을 외쳤다. 기준 중심으로 좌우와 전후 간격을 맞추다 보면 학년별 학급별 신장별로 전교생의 위치가 정해졌다.

국제 사회에서 ‘기준’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승전 후 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핵심 가치를 뼈대 삼아 분야별 국제 질서를 구축했다. UN과 NATO에 바탕을 둔 안보 질서, IMF와 세계은행이 떠받친 금융 질서, GATT에서 WTO로 진화한 통상 질서가 모두 미국의 작품이었다. 미국이 ‘기준’을 외치면 다른 나라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어 간격을 맞췄다.

그 질서에 순응하며 가장 많은 혜택을 본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우리는 안보의 시작과 끝을 한미 동맹에 의존했고,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무제한 물건을 내다팔 기회를 얻은 것이 한강의 기적의 도약대였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그 질서를 허물고 있다. 미국이 만들고 주도해온 체제가 미국에게 오히려 손해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나토나 한국 같은 동맹국들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미국의 안보 우산을 얻어 쓰고 있으며,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훔쳐갔다고 트럼프는 주장한다.

트럼프가 당선된 지 벌써 2년, 트럼프가 주장하는 새로운 질서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트럼프 독트린’의 요체는 뭘까. 백악관 관계자가 “우린 미국이다, 개자식들아. 어쩔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라고 솔직한 답을 내왔다. 미국의 신념을 전 세계에 투사한다는 사명감 속에 강자의 관용을 베풀던 미국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힘과 근육을 앞세워 폭력적 논리를 관철해 나간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트럼프 깃발에 대한 미국 내 반응은 극명하게 갈린다. 대도시 지식층은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던 가치들을 트럼프가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트럼프를 당선시킨 중소도시 핵심 지지층은 미국 우선주의의 경제적 과실에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 시대가 8년으로 연장될 것이라는 전망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무례하고 거친 트럼프 독트린에 분노하고 저항했던 다른 나라들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국은 트럼프 눈치를 보며 각자도생, 개별 약진해야 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선전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주도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의 리더십을 담당해온 서울대인들은 야만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 속에서도 향도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