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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2018년 8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20년 집권론’과 나무 백일홍

임석규 한겨레 디지털미디어국장, 본지 논설위원


‘20년 집권론’과 나무 백일홍




임석규
언어84-91
한겨레 디지털미디어국장
본지 논설위원


별나게 뜨겁던 여름이 간다. 이 여름을 너끈히 견뎌내고도 붉은 기운을 누그러뜨리지 않는 꽃이 있으니, 가을 초입에 이르도록 푸짐한 꽃을 피워내는 나무 백일홍이다. 유서 깊은 서원에 가면 어김없이 이 나무를 찾을 수 있다. 그 꽃말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니, 선비들이 가까이했던 것도 그 때문일 거라고 마음대로 상상해본다. 백일 동안이나 간다고 백일홍이라지만 백일 내내 꼿꼿하고 여일하게 꽃을 피워내는 건 아니다. 무수한 꽃이 피었다 지고, 지었다 피기를 되풀이한다. 그렇게 땡볕을 참아내고, 비바람을 버티다 보니 백일 동안 질기게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이성복, ‘그 여름의 끝’ 부분)’


백일 동안 붉은 꽃들을 피운다는 건 어쩌면 ‘백일 동안의 고통’과 맞닥뜨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흔히 권력을 꽃에 비유하곤 한다. 속성은 딴판이지만 세상을 홀리는 강렬함이 닮았고, 절정인가 싶더니 어느새 훌쩍 소멸해버리는 덧없는 퇴장의 순간도 비슷하다. 이와 관련해 널리 회자되는 어구가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다. 열흘 붉은 꽃 없고 10년 넘기는 권력 드물다는 의미다. 이를 ‘정권을 잡으면 일단 10년은 간다’는 뜻이라고 살짝 비틀어 해석한 정치인도 있다. 노태우-김영삼, 김대중-노무현,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30년 동안 10년씩 번갈아 집권했으니 아주 터무니없는 해석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여권에서 이번엔 10년을 넘어 아예 20년 동안 집권해야 한다는 얘기가 간간이 흘러나온다. 네 차례는 연속 집권을 해야 정책이 뿌리내릴 수 있다는 명분도 내세운다. 쿠데타나 부정한 방법이 아니라 좋은 정책을 펴서 계속 국민 지지를 얻겠다면 이를 비판할 이유는 없다. 44년 동안 장기집권하며 모범적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스웨덴 사민당 사례도 있다. 다만, 여권의 ‘20년 집권론’이 그만큼의 결연한 각오와 출중한 실력, 굳건한 지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오만하게 비치기 십상이요, 되레 역효과를 부를 수도 있다. 조석으로 바뀌는 게 민심 아닌가.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제 안에 소리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도종환, ‘목백일홍’ 부분)’


나무 백일홍이 백일 동안 꽃을 피우는 비결로 시인은 ‘거듭나고 거듭남’을 꼽는다.


힘들여 피운 꽃도 지는 건 잠깐이고, 애써 잡은 권력도 허물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꽃이 시들면 초라해지듯, 국민 지지를 잃어버린 옛 권력의 뒷모습도 한없이 누추하다. 요즘 우리가 생생히 목도하고 있는 그대로다. 폭염과 폭풍을 묵묵히 견디며 부단하게 거듭나는 나무 백일홍의 정진을 배우지 않는다면 ‘20년 집권론’은 한갓 한여름 헛된 꿈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