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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2018년 8월] 뉴스 기획

서울대인 귀농 4人 4色

귀농은 도피가 아니다, 도전이다

자연에 터 잡은 서울대인 귀농 4人 4色

김계수 동문(왼쪽)과 부인 선현숙씨가 작물을 수확하고 있다.



귀농은 도피가 아니다, 도전이다


휴가철을 맞아 도시를 떠나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녹음이 우거진 산이든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든 피서지에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냥 여기서 살까. 그러나 휴식을 위해 잠시 머무는 자연과 생활의 터전으로 눌러앉은 자연은 엄연히 다를 터. 이에 본지는 4명의 서울대인으로부터 귀농생활의 속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의 귀농시기와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80년대 학번으로 젊은 나이에 자발적으로 결심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선 비슷했다.

김계수 동문, 닭 키우는 전직교사 

김계수(사회81-85) 동문은 본인의 이름에 착안해 달나라의 계수나무처럼 깨끗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생산한다는 뜻을 담아 ‘달나무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고향친구인 아내 선현숙씨와 함께 전남 순천에서 농사지으며 산 지 18년째 됐다. 모교 졸업 후 그는 15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학생들과 소통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지식이 아이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회의가 들었죠. 교실은 그렇게 저를 내모는 반면 고향은 저를 손짓해 부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들판에서 일하는 게 너무 좋은데 이런 만족감이 도시에서의 피폐했던 생활에 대한 일시적인 반작용일까봐 걱정도 많이 했어요.”

2000년 10월 김 동문의 귀농에 이어 2001년 2월 그의 가족들도 고향으로 내려왔다. 현재는 논밭을 합쳐 약 5,000평 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고 닭을 1,000마리 정도 기르고 있다. 귀농을 준비하던 때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마을에서 처음 양계를 접했다. 마침 순천 인근엔 유정란을 생산하는 곳이 별로 없어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살충제계란 파동이 전국을 휩쓸던 지난해 여름에도 김 동문의 양계장은 끄떡없었다. 항생제나 성장촉진제를 전혀 쓰지 않고, 직접 기른 감자·무청 등을 먹이니 정부 기준의 친환경 품질을 훌쩍 넘어선다. 

많을 땐 300가구가 넘는 집에 달걀을 배달했지만 지금은 200가구로 줄었다. 고객이 떠난 게 아니라 김 동문이 억지로 배달을 줄였다. 모름지기 농사꾼이란 땅을 갈아 씨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발품을 팔아 집집마다 배달을 다녔죠. 먹거리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엔 무조건 믿는다는 신뢰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거든요. 규격화된 틀과 기준에 따라 거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증마크 없이도 20년 가까이 저를 믿어주는 소비자들이 저의 든든한 버팀목이죠.” 

김계수 동문은 2013년부터 4년 동안 ‘순천광장신문’의 이사장을 지냈으며, 창간호부터 연재해온 고정칼럼을 묶어 ‘나는 달걀 배달하는 농부’란 책도 펴냈다. 

 유재흠 동문(오른쪽)과 부인 임덕규 동문은 재학시절부터 농민운동의 뜻이 같았다.


유재흠·임덕규 동문부부, 28년 농사외길

유재흠(고고미술사86-91)·임덕규(영문86-90) 동문 부부는 전북 부안에서 올해로 28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모교 재학시절 열혈운동권이었던 유 동문은 당시 학생회 농민분과장을 맡고 있던 임 동문을 처음 알게 됐다. 일찍부터 농업에 대해 배우고 배운 것을 실천하고 있는 임 동문은 유 동문에게 존경스럽고 함께 하고 싶은 동지였다. 

“86년 건국대사건, 87년 6월 혁명 등을 겪으면서 휴학을 하고 고향인 춘천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움직이는 농사일을 경험했어요. 농민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모교로 돌아왔죠. 함께 농사지을 사람을 찾던 중 당시 인문대 농활준비대장을 맡고 있던 지금의 아내를 다시 만났습니다.”

복학 후 유 동문은 인문대학생회장이 됐고 평양축전준비 같은 통일사업을 하다가 8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됐다. 1990년 출소한 유 동문은 옥바라지를 해줬던 임 동문이 부안으로 농민운동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됐고 1991년 임 동문을 따라 부안으로 내려왔다.  

“우리 부부에게 최우선 순위는 농사입니다. 설혹 운동을 그만두더라도 농사는 계속 짓기로 약속했죠. 저희는 주로 벼농사를 짓는데 대략 4만~5만평 정도 됩니다. 보리나 밀 같은 이모작 작물도 5,000~1만평 정도 꾸준히 짓고 있어요. 모두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하고 있습니다.”

유재흠 동문은 귀농 10년 만인 2000년대 초반 친환경농경지를 만들었다. 협동경제 시스템의 가능성을 보고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 벌인 일이었다. 우렁이를 이용한 친환경농업을 적용해본 것인데, 결과가 만족스러워 해가 갈수록 함께하는 농가가 불어났다. 작목반원은 한때 100여 명에 이르렀고 농지면적도 340㏊까지 확장됐다. 승승장구하던 중 2008년 대형사고가 터졌다. 작목반이 유통시킨 친환경 쌀에서 잔류농약이 검출된 것. 귀농 후 맞닥뜨린 최악의 시련이었다.

“금전적 손해도 컸지만 정말 저를 괴롭힌 건 배신감이었습니다. 믿었던 이웃이 몰래 농약을 쳤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죠. 한동안 방황하다가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데에는 뭔가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이고, 그 기대의 밑바탕엔 ‘내가 당신들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하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후 마음을 바꿨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기로요. 그것이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길임을 깨달았어요.”

새롭게 마음먹은 유 동문은 작목반부터 정리했다. 유사사고 발생시 친환경 인증을 박탈하고 나머지 농가의 손실을 전량 보상키로 하는 등 책임 요건을 대폭 강화했다. 작목반원이 23명으로 줄었고 경작면적도 50㏊로 쪼그라들었다. 아이쿱생협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유 동문을 비롯한 작목반의 사정을 듣고 출하한 쌀과 밀 전량을 수매하기로 한 것. 유 동문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고 생협과 매해 계약재배를 이어오면서 현재는 연 6,000만원 가까운 소득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귀농민 출신 변호사 김태욱 동문은 농어민의 권익을 지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김태욱 동문, 귀농민 출신 변호사

김태욱(원자핵공학81-88) 동문은 모교 졸업 후 IT회사에 취직해 2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1989년 말 제주에 귀농했다. 이북에 고향을 두고 월남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해방 후 제주에 정착했고, 그때부터 약 1만평 규모의 귤 과수원과 약 2,000두 규모의 양돈장을 운영해왔다. 가업을 이어받아도 아쉽지 않을 만큼 형편이 괜찮았지만 이웃들은 김 동문을 이상하게 봤다. ‘서울에서 무슨 큰 사고를 쳐서 내려온 것’이라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다.

“제 나름대로 신중하게 귀농을 결정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 이웃들로 하여금 저를 오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좋은 대학 나와서 겨우 농사일을 하다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속내였을 테죠. 그저 묵묵히 제 결심을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귤 따고 돼지 치는 일에 전념했던 김 동문은 귀농 6년 만인 1995년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한다. 농축산민으로서 불합리한 불이익을 여러 번 겪으면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다른 이웃들을 돕기로 결심한 것. 김 동문 자신이 억울한 손해를 보기도 했다.

“대량으로 돈분을 발효해 퇴비로 만들기 위해 굴삭기가 들어가 작업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비닐하우스를 만들었습니다. 설계 단계서부터 시청 축산과에 드나들며 대형 비닐하우스 건립에 필요한 법적 절차에 대해 문의했었죠. 농장에 비닐하우스는 특별한 허가절차가 필요 없다고 했고요. 그런데 지어놓은 지 몇 달 후 산림과에선 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곳이 비록 농장부지긴 하나 지목이 임야이기 때문에 산림전용허가를 받고 지었어야 된다. 허가를 안 받고 지었으니 철거하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럼 지금이라도 산림전용허가를 받겠다. 불법으로 지으려 한 것이 아니고 축산과에 문의했을 땐 특별히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고 항변해도 무조건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어요. 결국 용역을 대동한 공무원들이 와서 비닐하우스를 강제 철거당했습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김 동문은 3년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시합격 후 김 동문은 농축산어민의 권익을 대변하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나경태 기자



인터뷰  조대성 (작곡96-03) 농부 


조대성 동문과 다섯살 난 그의 아들.


“쌈 채소 농사 9년차…주민과 친해지는 게 먼저지요”


40대 초반의 조대성(작곡96-03) 동문은 젊은 나이만큼 ‘튀는’ 귀농민이다. 지난 2010년 충남 홍성으로 내려가 올해로 9년째 쌈 채소 농사를 짓고 있는 그는 귀농 성공의 제1 요건으로 기존 주민들과의 연대를 꼽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끼와 재능을 숨김없이 발휘하고 있다. 2011년부터 7년 동안 뻐꾸기합창단을 결성, 운영하여 주민들에게 마음껏 노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줬으며 2013년부터 3년 동안 ‘조대성의 farm므파탈’이란 팟캐스트를 통해 농촌의 삶을 주제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2017년 10월엔 시골생활에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시골영감’이란 음반 앨범을 만들어 발매하기도 했다.


-기록적인 폭염이다. 농사는 괜찮나.

“농부가 하늘을 탓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참으면서 일하고 있다. 새벽부터 점심때까지, 그리고 오후 늦게 두어 시간 동안 일하고 한낮엔 다른 볼일을 보거나 쉬고 있다.”


-재배한 작물은 잘 팔리는지.

“귀농초기 조직했던 ‘젊은협업농장’에서 독립해 지난해부터 개인 농사를 짓고 있다. 비닐하우스 2개동, 400평 규모로 아욱·상추 같은 엽채류를 유기농으로 재배한다. 동네식당 한 군데와 직거래를 하고, 대부분의 작물은 홍성유기농영농조합에 납품한다. 영농 초창기 땐 지인들이 팔아줬다. 처음 한두 번 정도는 친분 때문에 사주지만 세 번째부턴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산뿐 아니라 유통에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나는 생산에 집중하기로 했다. 생협과 계약을 맺고 재배, 유통하기 때문에 연중 일정한 값을 받고 팔 수 있다.


-귀농 전엔 무슨 일을 했나.

“아트센터 나비 미술관에서 프로덕션팀 소속으로 6년간 일했다. 퇴사 전엔 팀장으로 진급도 했다. 돌이켜보니 한창 잘 나갈 때 그만둔 것 같다.”


-귀농의 계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대한 답이었던 것 같다. 음식산업과 경제정의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먹거리와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됐고, 유기농 농산물을 판매하는 동네 생협을 이용하게 됐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보자는 취지로 자전거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에서 사는 한 이러한 노력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고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 귀농을 결심했다. 생각해보면 무모했고 그런 만큼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귀농을 생각 중인 분들에게 조언하자면.

“은퇴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한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편하게 생각해도 상관없지만 농사로 돈을 벌어야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창업과 마찬가지다. 자신의 건강과 체력, 가족의 후원, 귀농지 선정과 주택 마련, 작목 선택과 유통처 확보 등 도시에 사는 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이 몰아쳐온다. 국내 농수산 환경 또한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도전이 아니라 도피라면 말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