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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호 2018년 6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덴마크 정자’라고요?

홍지영 SBS 뉴미디어뉴스부장·본지 논설위원

‘덴마크 정자’라고요?



홍지영
불문89-93
SBS 뉴미디어뉴스부장
본지 논설위원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덴마크 정자 수입’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요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이 정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서 덴마크 정자를 수입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거였다. 게시글은 건마다 3,000~5,000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지만 청와대는 ‘정자 수입’ 글이 규정에 맞지 않는다며 발견되는 즉시 삭제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기혼 여성의 경우에만 일정 조건 아래 정자를 기증받을 수 있고, 미혼 여성은 불가능하다. 정자를 기증받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인정받은 남편의 서면 동의가 필요하고, 금전적으로 정자를 사고 파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원자들이 정자 수입국으로 ‘덴마크’를 꼽은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예쁘고 잘생긴 아이를 갖고 싶다는 거다. 우월한 정자를 선택해 임신한다는 것은 여자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큰 키에 금발, 푸른 눈을 가진 북유럽 남자의 우월한(?) 정자로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국가적으로도 이득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전세계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서인지, 덴마크에는 세계 최대의 정자 은행이 있다. 크리오스 인터내셔널(Cryos International) 사는 전세계 40개국으로 정자를 제공하는데, 이런 현상을 꼬집어서 ‘현대판 바이킹족의 이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 회사 홈페이지를 보면 키, 인종, 머리카락 색, 눈동자 색, 체중 등 여러가지 조건으로 정자를 검색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크리오스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 이름을 보면서 파리 특파원 시절, 경마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한 회사가 생각났다. 우수한 혈통의 말을 보존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인공 수정을 시키는 곳이다. 일반 고급말, 승용말, 경주용 고급말 등을 분류해서 원하는 대로 말을 생산(?)해 낸다는 거였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경마가 귀족 스포츠였던 만큼 말산업도 훨씬 앞서 있구나.’ 감탄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말은 그렇다 쳐도, 아이를 원하는 대로 갖는다는 말은 왠지 섬뜩하다. 소중한 존재가 돼야 할 자신의 아이를 상품처럼 골라 만들다니.(물론, 내 아이는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갖겠다는 반론이 청와대 청원의 주요 요지이기는 했다.) 모성애를 가진 여성으로 아이를 원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더 확실히 깨닫게 됐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성애를 가진 여성으로 왜 아이 입장은 생각하지 못할까?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면 아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왜 없을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아이의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까?

한 남자의 정자로 태어난 수많은 이복 형제들 사례는 벌써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근친혼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