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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호 2018년 6월] 뉴스 기획

당신의 헌신이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재학생들이 찾은 참전·전몰 동문 7인 이야기
당신의 헌신이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재학생들이 찾은 참전·전몰 동문 7인 이야기

지난해 11월 15일 모교 관악캠퍼스에서는 자유전공학부 주최로 모교 출신 참전·전몰 동문 스토리텔링 발표회가 열렸다. 다양한 학과 소속 재학생 10명이 직접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전쟁 참전·전몰 동문들의 이야기를 발굴해 선보인 시간이었다. 이날 김중만(상학48입)·김세환(국어국문47입)·권석홍(섬유공학48입)·노갑병(법학50입)·박명근(의학54-60)·김익창(의학49-56)·이중희(섬유공학50-57) 동문 등 기존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참전·전몰 동문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삶을 되새기며 본지에 그 이야기를 소개한다. 정리=박수진 기자


좋은 남편이자 군인이었던 청년
김세환(1927.12.14.~1951.8.2.) 국어국문학과 1학년 재학 중 참전


김세환 동문은 경북 구미에서 유복한 가정의 외동으로 태어났다. 모교 입학 전 그는 구미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독립 이후 대학이 새롭게 정비가 되면서 고등 교육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는 분위기였다. 일본의 교육을 받기 싫었지만 공부에 계속 뜻이 있었던 많은 이들은 교사로 꿈의 허기를 채우고 있었고 김 동문도 그러했다. 서울대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상경한 그는 시험 일정을 놓쳐 바로 입학하지 못한 대신 조선어학회에서 한국어 공부에 정진했다. 모교 입학 후에는 방언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고 문화부장도 맡았다. 동숭동 근처에 살면서 아내는 작은 가게를 열어 생활비를 벌고, 비는 시간에는 비싼 책을 필사하며 부부가 알뜰살뜰 살아가는 생활이었다.

어느날 서울대 근처에서 무장 군인이 보이고 총성이 들리기 시작하자 김 동문과 가족은 피난길에 오른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피난길에서도 머슴같이 옷을 입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안정되자 김 동문은 “전쟁이 어느 정도 끝난 것 같으니 서울 집과 학교는 괜찮은지 확인해 보겠다”는 말을 하고 상경한 후 장교로 참전했다. 정확히 어떤 사정으로 군인이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군복을 입은 그가 직접 고향에 돌아와 동기들과 함께 정훈 장교로 자원입대했음을 알렸을 뿐이다. 이후에도 몇 번 고향집에 휴가차 들러 가족과 다정한 시간을 보냈지만 나라의 부름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좋은 남편이자 군인이었던 김 동문은 어느날 한 장의 전사통지서가 되어 돌아왔다. 중대본부에서 오지에 있는 후진 부대를 독려하기 위해 출장을 갔다가 원인 모를 복통을 호소했고, 약도 없어 다음날 운명했다는 소식이었다. 부인 황영자 씨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애틋한 기억들을 생생히 기록해 놓았다.


고무신 팔아 공부하던 고학생
김중만(1928.8.2.~1951.8.13.) 경제학과 3학년 재학 중 참전

김 동문은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해 당시 명문이던 경기중(현 경기고)을 다녔다. 고교를 졸업한 지 2년 뒤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동갑내기 부인 허은남 씨를 가족으로 맞이한다. 1949년 스무살의 나이로 새신랑이 된 그는 경성대에서 서울대로 넘어가는 시기 시행된 2년제 대학 예과 과정을 수료하고 상대 본과로 들어가 본격적인 서울대 학생의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예과 시절부터 할아버지가 마련해준 청량리 가게에서 고무신을 판매하며 생활비를 마련할 만큼 수완이 좋았다.

1950년 6월 3일 사랑스러운 딸이 출생했지만 채 옹알이도 하기 전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사촌과 아버지, 어머니까지 함께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북한군과 소통하던 아버지의 친구가 신고해 잡혀 끌려가게 됐고 가까스로 탈출하면서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숨어만 다니면 언젠가는 또 다시 북한군에게 붙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이에 김 동문은 1950년 12월 부산에서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소위로 임관하면서도 아내와 부모에게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는 편지를 쓰며 다시 만날 날을 고대했지만 1951년 8월 13일 인제에서 사망하게 된다.
김 동문의 부인 허은남 씨는 1989년 작고했기에 김 동문의 딸이 이야기를 전해왔다. 딸이 친척과 이웃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전쟁 중에도 김 동문은 자신이 팔던 고무신을 주변에 몇 켤레씩 챙겨주며 다시 보자고 약속했다. 고무신을 받았던 가족과 이웃들은 후에 김 동문의 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태어난 지 2년도 안 되어 아버지를 잃은 딸은 60년이 넘은 지금도 아버지의 전사 통지서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정의감 넘치고 음악 좋아했던 법학도
노갑병(1930.~1951.5) 법학과 재학 중 참전

노갑병 동문은 함경남도 갑산 출생으로 해방 이후 월남해 용산중을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도평의원과 부읍장 등을 지낸 지역 유지였다. 가족이 월남한 후 본가의 사정도 나빠져 노 동문은 세브란스 의대에 다니던 맏형과 함께 서울에서 고학해야 했다. 1950년 6월 모교 법대에 입학해 신입생 환영회까지 마쳤을 무렵 전쟁이 발발했다. 1951년 자원입대한 그는 장교로 임관 후 교관으로 근무하다 5월 경 고양지구에서 전사했다.

당시 청년들이 참전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노 동문의 경우 이전의 행동에서 참전 동기를 헤아려볼 수 있다. 용산중 재학 시절 그는 학내 비위 문제로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불온 학생’으로 낙인찍힐 법한 행동이지만 이후에는 관제 학생단체인 학도호국단의 간부가 됐다. 그가 학생들 사이에 인망이 높았으며 월남가족이라는 점도 작용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학도호국단 간부 활동으로 갖게 된 반공주의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은 자원 입대에도 영향을 줬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 동문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참전 동기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에 앞서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리에 대항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정의감 넘치는 모습 뒤엔 평범한 일상도 엿보인다. 아버지와의 다툼 끝에 모교 법대에 진학하긴 했으나 본래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전국학생음악경진대회에 나갈 정도였고 전장에서도 악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전황이 좋지 않아 초급장교가 차출될 무렵 그는 자원해서 고양지구에 배정됐다가 2주 만에 전사했다. 스무 해 남짓의 짧은 삶이었다. 부친 노홍주 씨는 회고록에 아들에 대한 기억을 상세히 기록해뒀다.


전장에서 일기 쓰며 의대생 꿈 꿔
박명근(1934.9.30.~) 소년병 참전, 제대 후 모교 의과대학 입학

박명근 동문은 16세의 나이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제대 후 모교 의대에 진학했다. 황해도 능리에서 태어난 그가 어린 나이에 북한 출신으로 국군에 입대한 것은 북한에 대한 적대심 때문이었다. 공산당이 3·1운동을 폄하하는 데 대해 박 동문의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어른들이 반대 연설을 했고, 그 일로 가족과 주변인들이 반동 분자로 낙인 찍혀 차별을 받았던 것. 결국 그는 가족들의 원수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6·25 발발 후 6개월 뒤에 육군 6사단에 자원입대한다. 수색대, 7연대 등에서 복무하다가 1951년 총상을 당해 이듬해 명예 제대했다.

어린 소년병은 매일같이 전장에서 일기를 썼다. “훗날 부모님을 다시 만나 인사드릴 때 자랑스러운 증거로 내놓고 싶어서”였다. 제대 후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써내려가며 꿈을 키웠다. 매일 피난민 연락소의 명부를 확인하며 가족과 재회의 끈도 놓지 않았다. 이 일기를 묶어 자서전 ‘소년병의 일기’로 출판했다.
모교에 입학한 것은 이렇게 전장에서도 잃지 않은 희망 덕분이었다. 제대 후 박 동문은 미군부대 경비원 일을 하면서 어렵게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모교 의대에 진학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또래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그의 말이다. 한국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기엔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았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아과 전문의가 됐다. 캔자스대 의대, 바레인 아라비안걸프 의대 소아심장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고 텍사스대 의대 명예교수로 퇴직했다. 2005년 모교 의대동창회가 수여하는 제6회 함춘대상(학술연구 부문)을 수상했다.


통역관으로 흥남철수 현장 참여
김익창(1930.4.22.~2015.7.12.) 의예과 재학 중 참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한 김익창 동문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 공산치하의 북한, 한국전쟁과 전후 한국, 도미 후 이민 사회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다. 공산 치하의 신의주에서 많은 고통을 받은 그는 월남해 서울중(서울고)을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 문리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전쟁 발발 후 그는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에서 어머니가 공산당국에 납치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던 중 육군 대위 친척의 소개로 영어 시험을 거쳐 계급도 없는 민간인 통역첩보요원이 된다. 통역첩보요원으로 함흥에 도착했을 때 유엔군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흥남철수 작전이 펼쳐졌다. 그는 수송선 선장의 통역 자격으로 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미국 수송선에 올랐다. ‘기적의 배’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피난민들이 선장의 주의사항에 협조해 안전하게 거제도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가족들과 해후한 김 동문은 부산에서 의무 하사관으로 해군에 입대한다. 이후 의사 부족으로 의과 대학생들의 제대를 앞당기는 조치가 시행돼 부산의 임시 대학으로 복교했다. “캄캄한 천막교실 안에서 60촉의 불을 켜 놓고 책이나 그림 자료도 없이 교수가 칠판에 그림을 그리면서 해부학 강의를 했다”고 돌아본다.

모교를 졸업한 후 김 동문은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와 사회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재미한인정신과의사협회를 창설했으며 캘리포니아 데이비스의과대학에서 임상정신과 교수로 35년간 봉직한 후 은퇴했다. 파킨슨병을 진단 받고 은퇴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2015년 별세했다. 자서전 ‘사선을 넘어서’에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


병역 대상 아니었지만 나이 늘려 참전
이중희(1931.8.21.~) 섬유공학과 재학 중 참전


이중희 동문은 서울사대부고 졸업 후 모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18세때 전쟁이 발발해 대구로 피난을 갔다가 미군의 통역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임시로 중위 계급장을 받아 최전방까지 가게 된다. 전쟁의 참혹함을 한 번 경험하고도 그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에 나이까지 속이며 자원입대를 결심한다. 모교 1학년 당시 병역대상자가 아니었지만 나이를 두 살 올려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보병 수도사단 최전방에 배치된 이 동문은 치열한 전투 한가운데서 사경을 넘나들었다. 당시 유행어였던 ‘소모품 소위’의 비애를 느낀 시간이었다. “고위 장교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는 미군과 달리 한국군은 최전방에서 대위 이상의 장교를 본 적이 없고, 불쌍한 사병들만 실제 전쟁을 했다”는 그의 기억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모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한 국영 기업에 입사했으나 또 다시 부조리를 목도하게 된다. 입사자격에 명시한 병역필이라는 조건과 달리 실제 합격자들의 대다수가 병역 기피자였던 것이다. 이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그는 ‘병역 기피자’로 몰려 결국 파면 당한다. “1953년 제대할 때 받은 것은 광목 한 장이 전부”였다. 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나섰던 참전 용사로서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수학과 학사 학위,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공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재미 과학자로 활동한다. ‘Standard Testing & Engineering’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16년 국가보훈처로부터 호국영웅기장을 받아 억울함을 씻은 그는 “한국군뿐 아니라 세계 16개국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참전한 장병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경의를 표해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지난 6월 5일 모교 보직교수들이 현충원 충혼탑을 찾아 참배했다. 사진=모교 홍보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