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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2018년 5월] 기고 에세이

동숭로에서: 엔지니어링과 공부와 시

김 철(전기공학60-66) 시인, 한국자유문인협회 국제교류회 의장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엔지니어링을 한자로 표기하면 ‘工學’이 된다. ‘工學’의 ‘工’자는 공부(工夫)의 ‘工’과 같은 것으로서 하늘과 땅을 잇는 형상을 하고 있다. 즉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이치를 연구하는 행위가 공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하겠다. 또 문학(文學)은 글만 쓰면 되는 게 아니라 천문학(天文學)의 줄임말로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학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공학을 기름쟁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공학임을 알아야 한다. 공학은 수학(數學)이고, 수학은 시스템이며 질서이고, 표준인 동시에 어쩌면 철학적인 사고방식의 기저(基底)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공학의 길을 걷기 위해 1960년에 공대에 입학한 나는, 상계동에 캠퍼스가 위치한 탓에 4·19에 불참한 유일한 대학으로 5월을 맞은 서울공대 강당에서 어느 날 김남조 시인의 특강을 듣던 중 “테레사 수녀님께서 가족과 종교 중 하나를 택하라면 가족을 택하겠다고 하셨는데, 나도 가족과 시 중 하나를 택하라면 가족을 택할 것입니다”라는 시인의 말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지난 1월 초 김동길 박사님을 모시고 떠난 크루즈여행에서 실로 58년 만에 뵙게 된 김남조 시인께 그 이야기를 들려 드렸더니 기억이 안 난다고 고개를 저으셨는데, 그 추억이 서울공대에서 처음 경험한 간접적인 시적(詩的) 만남이었다.


내가 재학 중 서울공대는 1964년과 1965년 봄에 서울예총회관에서 시화전을 개최했는데 그때 내가 나서서 지도교수로 초빙했던 김수영(金洙暎) 시인을 곧바로 스승으로 모셨던 나는 1964년부터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1968년까지 기자들도 출입하기 힘든 마포구 구수동의 자택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 뵐 때마다 공부를 하라,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시던 김수영 시인을 닮았는지 나 역시 부산고 후배들이 찾아오면,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학과 외국어 등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해 주고 있는데, 김수영 시인과의 인연이 바로 서울공대에서 경험한 직접적인 시적 만남이었던 것이다.


파스테르나크와 흡사한 김수영 시인의 에토스(ethos)를 깊이 감수(感受)했던 나는, 시는 언어로 빚어지지만 그 뿌리가 수학(數學)에 닿아 있을 때 가장 빛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어떤 이즘(ism)이나 시류(時流) 또는 시풍(詩風)에도 구애됨이 없이 구상과 추상의 세계를 자유분방하게 넘나들며 ‘공부하듯이’ 공들여 시를 쓰고 있다.


1973년경 28명이던 부산의 시인이 근 1,000명 가까이 불어난 오늘날 공부하는 시인이라야 진정한 시인의 두겁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써 본 시가 부끄럽지만 이 졸시 ‘공부’라 할 수 있다.


공부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다 공부처럼 쉬운 건 없다고 한다.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리라. 수학 공식이나 외고 영어 단어나 외고 육법전서나 외는 것이 공부라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적어도 게오르크 칸토처럼 무한과 유한의 관계를 두고 연찬(硏鑽)하는 경지에 들어가야 공부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의 유한과 무한에 대한 고뇌의 숲속을 헤매다가 내 나름대로 무한성(無限性)을 도형화해 보았다. 숫자를 1 2 3 4····n처럼 일직선으로 나열하여 수(數)의 끈을 만든 후 둥글게 구부리면 n개의 수를 원주(圓周)로 한 원이 만들어지는데 n을 계속 크게 하면 이 원은 한없이 커지고 또 커진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체계요 원리라 깨달은 나는 그 원의 안팎을 넘나들며 별과 모래의 유한과 숫자의 무한 때문에 오늘도 미친다. 아 게오르크 칸토여 공부여 나를 구해 다오.




김 철(전기공학60-66)


부산고 졸업 후 모교 공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시절 김수영 시인을 사사하고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으며, 당시 문학도의 최고 등용문인 현대문학에 초회추천, 추천완료됐다.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자유문인협회 국제교류위 의장을 맡고 있다. 시집 '말의 우주宇宙'(1992), 한영대역시집 '아침(The Morning)'(1998). 산문집 '어느 지성知性의 포트폴리오'(1999), 시집 '비와 나무와 하늘과 땅'(2014)을 냈다.





*게오르크 칸토어(1845-1918):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의 수학자. ‘집합론’의 창시자로 무한도 유한처럼 셀 수 있다는 이론을 10년이 넘는 검토를 통해 정립해 베를린대에 논문으로 제출했으나 거부당하고 비난만 받자 우울증에 빠졌으며, 한 시골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그 길로 생애를 마쳤다. 만년에 그의 업적은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