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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호 2018년 4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김영란법’ 발의한 김영란 서강대 법전원 석좌교수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 만들어 보람”

‘김영란법’ 발의한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 만들어 보람”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지난 3월 16일 김영란(법학75-79)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본회 관악대상을 수상했다. 헌정사상 최초 여성 대법관,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금지법을 발의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킨 그의 공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관악대상 수상 기념을 겸해 대학시절 얘기를 묻고자 인터뷰를 청했다. 한때 독문학을 전공하고 문학평론가의 길을 가고 싶었다는 김 동문은 교내 소설 공모에도 당선된 적이 있다. 모교 도서관에서 1976년 교지 ‘서울대’ 창간호에 실린 그의 단편소설을 찾을 수 있었다. 3월 26일 서울 대흥동 서강대학교 로스쿨 연구실에서 김 동문을 만났다.



1학년 때 소설 발표 후 ‘꺼삐딴리’ 전광용 교수 연락 와
좀 더 창의적이고 보람 느낄 수 있는 노년의 삶 고민


-관악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영광입니다. 한편으론 공무원으로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상을 주셔서 송구하기도 해요. 법관으로선 재판에 임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지만 많이 부족했습니다. 권익위원장으로선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에 걸맞은 제도를 갖춰서 백년을 대비하려고 했지만 그 또한 많이 부족했죠. 특별히 자신을 희생하면서 한 일도 아니라 민망하고, 대단치 않은 일들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소감을 묻고 바로 1학년 때 교지에 발표한 소설의 복사본을 건넸다. 뜻밖의 추억을 접한 김 동문은 ‘창피하다’면서도 반가운 얼굴을 했다. 스무 살의 그가 쓴 소설 ‘문(門)’의 첫머리는 이렇다. ‘나는 조금씩 문을 닫고 있었다. 문을 닫아 가는 것-그건 물론 내 스스로 택한 바가 아니었다. 사실 내가 택하고 말고 할 처지도 아니었다. (중략) 문을 닫아 가면서 난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설을 쓸 정도로 문학청년이셨어요.
“1학년 여름방학 때 교지를 만든다고 해서 하나 써본 거예요. 습작도 안 하고 거의 처음 쓴 글이에요. 고등학교 때 신문 편집위원 맡아서 기사 쓰고, 학교 백일장에서 장원 한 번 해본 정도였죠.”

-어떤 생각을 소설로 쓰셨나요.
“당시에 고민이 많았어요. 법대를 갈 건지, 고시공부를 할 건지. 사회계열로 입학해 법대는 2학년 2학기부터 다녔어요. 법 공부는 싫은데 집에선 법대를 가라고 하고, 학교 다니기 너무 싫었어요. 이때 쓴 소설이 하나 더 있는데 제목이 ‘덫’이에요. 4학년 때 법대 문우회지 피데스에 실렸죠. 현재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다, 뭘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런 정리 안 된 생각들을 글로 표현했던 것 같아요. 카프카 책을 즐겨 읽었기 때문에 약간 카프카 풍으로 썼을지도 몰라요.”

-대법관까지 지내셨는데 법 공부를 싫어하셨다니 의외예요.
“저는 남을 판단하고, 판결하는 일이 지금까지도 적성이 아닌 것 같아요. 공부하고 책 읽기 좋아하니까 그런 일을 계속 하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계속 글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요.
“교지에 실린 걸 보고 꺼삐딴 리를 쓰신 전광용(국문47-51) 당시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이 법대로 연락을 해오셨어요. 찾아뵀더니 앞으로 소설 쓰라고…. 등단할 글재주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글을 써도 문학 작품은 못 쓸 것 같아요. 꼭 문학일 필요도 없는 것 같고.”

-관악캠퍼스 첫 세대시죠. 학교 첫인상이 어떠셨나요.
“썰렁하고 황량하고, 너무 추웠어요. 수업도 제대로 진행이 안 됐죠. 70년대니까. 입학하자마자 한 달 만에 휴교령이 내려졌어요. 그땐 지금의 교문이 없고 경찰이 캠퍼스 내로는 진입을 안 하던 시절이에요. 데모가 일어나면 경찰들이 학교 앞을 다 막고 학생들은 돌을 던지던 풍경이 생각나요. 학교에 아무것도 없어서 서클 모임도 대학로 옛 문리대 캠퍼스까지 가서 했죠.”

-당시엔 여학생도 많지 않았죠.
“사회계열 여섯 개 반 통틀어 여학생이 세 명이고 우리 반엔 저 혼자였어요. 법대엔 여학생 화장실도 없었죠. 여성들에게 직업 롤모델이 거의 없을 때예요. 선생님이나 은행원 정도? 전문직 여성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죠.”

-고시 공부는 어디서 하셨어요.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했어요. 지금도 있나 모르겠는데 음향도서관이라고, 음반 죽 놔두고 헤드폰으로 신청곡을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안쪽에 있었어요. 시설이 굉장히 좋았어요. 공부하기 싫을 때 가서 음악 들으면서 공부했죠. 클래식을 좋아해서 브람스 교향곡을 많이 들었어요. 밤 아홉시 반쯤 되면 도서관에서 상도역까지 태워다주는 학교 버스 타러 나왔어요. 열 시까지 앉아 있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저는 그 삼십분도 못 견디겠어서(웃음).”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인터뷰 도중 포즈를 취했다.




-조금은 특별한 학생이었을 것 같아요.
“4학년 초 사시에 합격했어요. 또래들 중엔 빨리 붙은 편이죠. 합격했을 때 다들 ‘공부도 열심히 안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붙었지’ 하는 분위기였어요. 3학년 때 1차 시험 합격한 게 아까워서 하는 수 없이 3학년 겨울방학부터 봄에 보는 2차를 준비했거든요. 집중해서 하긴 했지만 바로 합격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 그때 남학생들이 내린 결론이 ‘평소에 글을 좀 쓰더니, 답안지를 잘 썼나보다’. 정말 그랬는지도 모르죠.”

-법대가 사라졌는데 아쉬움은 없으세요.
“법대가 꼭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저는 서울대가 어떤 경쟁을 목표로 하기보단 역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을 데려와서 최상의 교육을 시켜주는 기관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이상적인 말이죠.”

2012년 김 동문이 발의한 ‘부정청탁금지법’은 사회 풍토를 크게 바꿔놨다. 2016년 이 법이 시행된 이후 그의 의도대로 흘러온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었다. 정착되기까지 서울대 내에서도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말에 그는 “그러니 더 잘 된 것”이라고 답했다.

“청탁금지법의 핵심은 공무원들이 처음부터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래도 제가 죄송하단 얘기 많이 하고 다녔죠.”

청탁금지법 시행과 함께 개헌, 미투운동, 북한과의 관계 개선 등으로 대한민국이 새로운 변혁기에 들어섰다. 김 동문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개헌에 대한 생각부터 물었다. “87년 체제까지만 해도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게 목표였어요. 대통령 직선제가 그 중 하나였죠. 지금은 기존의 대의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의문이 생긴 시대예요. 투표권을 가진 우리의 민의를 반영해주지 않는다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일 수 있느냐는 거죠.

우리나라처럼 사람들이 학력 수준도 높고 정치에 민감한 나라가 흔치 않아요. 더 이상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 돈 많은 사람들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르는 시민으로 남지 않겠다는 생각이 많아졌죠.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정치를 해달라는 요구가 대두하고 있고요. 지금 개헌 논의가 여러 갈래로 가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민의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예요. 종전의 근대법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결과가 나올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개헌 논쟁을 보는 편이죠.”

-한국 사회의 격변기 같아요. ‘미투 운동’도 그 일환이죠.
“우리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예고하는 흐름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예스면 예스, 노면 노라고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여러 모습 중 하나죠.

경제적인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우리 사회 다른 분야들도 계속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변화가 어떤 사람에겐 불편하고 불안할 수 있어요. 변화의 방향이 우리가 가야 할 미래와 일치하는지,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면서 수용할 건 해야죠. 미투의 경우도 근시안적인 남녀 대결 구도로 싸우는 방식은 전혀 우리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2010년부터 서강대에서 강의하고 계시죠.
“‘판례실무 연구’란 이름으로 대법원 전원합의 판결을 해설하는 강의예요. 로스쿨 학생들은 변호사시험 준비하느라 치열하게 논쟁 중인 판결들을 자세하게 읽을 여유가 없을 것 같아서 만들었죠.”

-사람들과 자주 모이는 편인가요.
“친한 친구 두셋 만나고, 책 읽는 모임 정도. 대부분은 혼자서 제 시간을 즐기는 편이에요. 대법관 마치시고 재판연구관 했던 분들과 자주 모이는 분들도 계시던데 전 그런 모임이 아예 없어요. 같이 일했던 판사들도 ‘아이, 우리 부장님은 저런 거 싫어하시니까’ 하죠. 인간미 없어 보일 순 있어요. 젊은 후배들에게 한 번씩 전화하고 만나서 어려움도 들어주면 좋은데 상대에겐 그게 또 부담될 수 있잖아요. 오랜만에 얼굴 보자고 연락 오면 거절하진 않아요.”

-친구가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성향이 비슷해야 하는 것 같아요. 읽고 있는 책, 좋아하는 영화, 음악에 공통점이 있거나. 얘기할 거리가 풍부한 사람들과 친해지는 거죠.”

-저서 ‘책 읽기의 쓸모’에서 유일한 도락(道樂)이 전공과 무관한 책 읽기라고 말씀하셨죠. 요즘엔 어떤 책을 읽으세요.
“티베트 불교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요.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도 재밌게 읽었죠. 전자책(E-book)도 쓰는데 여행 갈 때 좋아요. 여러 권 들어가고 불을 켜지 않고도 읽을 수 있고. 아프리카에 캠핑 여행을 갔을 때 텐트 안에서 편하게 읽었어요.”

-여행 좋아하시나요.
“소설 좋아하는 것과 비슷해요. 일종의 ‘래빗 홀’이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를 따라 구멍으로 들어갔더니 전혀 다른 세상이 나왔잖아요. 여행도 그래요. 여행에서 자기자신을 찾는다고들 하는데 전 오히려 자신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가는 것 같아요. 최근엔 두 딸, 남편과 넷이서 차를 빌려 조용하게 다녔던 여행이 좋았어요.”

-독서가는 TV를 멀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드라마도 즐겨 보신다고 들었어요.
“요즘에 재밌게 본 건 없고, 예능 중에 ‘효리네 민박’ 재밌게 봤어요. 경치가 너무 좋아서. 큰 집은 필요 없지만 저런 그림 같은 전원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는데 과연 실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파트에 너무 길들여져서.”


지난 3월 16일 제20회 관악대상 시상식에서 기념 촬영. 왼쪽부터 두 번째 김영란 동문, 남편 강지원 동문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가 청소년 상담 전문가시죠. 아내의 고민 상담도 잘 해주나요.
“시원시원하게 얘기해주니까 도움이 되죠. 대부분의 문제는 저 혼자 해결해요. 말만 하면 풀리는 문제는 딸들하고 툴툴거리면서 풀어버리고요.”

-꿈꾸는 노년이 있다면.
“경쟁이 심한 사회니까 어쩔 순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늦게 출발해서 너무 일찍 끝나요. 짧은 시간 죽어라 일하고 갑자기 노년을 맞죠. 모든 사람에게 이삼십년이 늘 남고 저한테도 그건 숙제예요. 그 동안 공무원으로 계속 창의적이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요. 좀더 창의적이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박수진 기자




김 동문은…4학년 때 사시 합격, 최초 여 대법관


김영란 동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법관 출신 법조인이다. 대법관 재임 당시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의 권리와 환경권·노동권 등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강조한 판결로 ‘소수자의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성의 종중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과 성전환자의 호적정정을 허가해야 한다고 낸 다수의견, 학교의 종교행사 참여 강요는 종교 자유 침해라고 판단한 ‘강의석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2010년 대법관 퇴임 후 관행적인 변호사 개업 대신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부임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같은 해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임명돼 2012년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속칭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이 법은 2016년 시행 이후 그간 사회적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돼 온 부정 청탁을 근절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경기여고 출신으로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20회)에 합격했다. 강금실(법학75-79) 변호사, 조배숙(법학75-79) 국회의원과 고교·법대 동기로 절친한 사이다.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가정법원·서울지방법원·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지내고 2004년 48세의 나이로 대법관에 임명됐다.

서울지방법원 판사 시절 서울지검 검사였던 강지원(정치68-72) 변호사와 결혼해 슬하에 두 딸을 뒀다. 국내 최초 판검사 부부로도 화제가 됐다. 김 동문의 남동생은 김문석(법학77-81)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여동생은 피아니스트 김석란(기악80-84) 동문이다.

저서로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창비)’,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풀빛)’, ‘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창비)’, 공저로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쌤앤파커스)’, ‘김영란법 김영란에게 묻다(풀빛)’가 있다. 청조근정훈장, 한국여성지도자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