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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호 2024년 7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경부·영동·호남·88고속도로…내 땀이 배어 있습니다”

황해근 (토목54-60) 동일기술공사 회장

“경부·영동·호남·88고속도로…내 땀이 배어 있습니다”

황해근 (토목54-60) 동일기술공사 회장



 
32세 건설기술사 1호 취득
대한민국 도로 건설 산증인
2024 금탑산업훈장 받아
 
한국건설감리협회 회장 역임 
엔지니어링공제 이사장 3연임

총동창회·모교 각각 2억원 기부
“성실한 엔지니어가 토목의 미래”

 
6월 12일 한국엔지니어링협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열린 ‘2024 엔지니어링의 날’ 기념식에서 황해근(토목54-60) 동일기술공사 회장이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황 회장은 국내 1호 기술사로 ‘대한민국 도로 건설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경부고속도로부터 거제대교, 서울의 내부순환로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도로는 손에 꼽을 정도다. 

황 회장은 나눔 활동도 열심이다. 1997년 총동창회에 5000만원의 장학금 출연 이후 꾸준히 기부해 현재 2억원의 ‘황해근·이금옥 특지장학금’을 운영 중이다. 지난 20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홈커밍데이, 정기총회 등의 행사도 후원하고 있다. 모교 건설환경공학부와 병원에도 각각 1억원을 기부했다. 지난 7월 3일 서울 송파구 동일기술공사 사옥에서 황해근 동문을 만났다. 
 
-금탑산업훈장 수훈을 축하드립니다.
“토목인으로 걸어온 60년 외길 인생을 인정해 준 것 같아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년이 구순이시죠? 매주 라운딩을 즐기신다고요.
“2013년 심장 이상으로 수술 후 몸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매일 출근하고 저염식으로 소식하며 많이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정신에 해로운 것은 생각도 안 하고 보지도 않습니다.”

-동기 모임도 하실 것 같은데.
“40명 입학했는데, 현재 10명 정도 남았습니다. 가끔 봅니다.” 

-토목인 외길을 걸어오셨습니다. 토목공학과 입학 동기를 말씀해 주세요.
“청소년 시절 독서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구미, 러시아 고전을 탐독했죠. 정의로운 법학도를 꿈꿨습니다. 고3 때 서울 농대에 재학 중이던 큰형님과 대화하는 중에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몫’이라는 말씀이 크게 와 닿았어요. 황폐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어린 시절 아버님께서 제게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가 되라고 하셨던 말씀도 떠올랐고요. 공학도로 진로를 변경하게 됐습니다.”

-국내 1호 기술사이기도 하신데.
“1964년 64개 전문분야에서 67명의 기술사들이 배출됐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경력기술자들이었어요. 국가자격시험을 실시해 기술사 자격을 공인한 것은 1968년에 실시한 제2회 기술사시험부터였죠. 당시 32세의 나이로 건설부문 기술사 자격을 제1호로 취득했지요. 1969년 12월에는 건설기술자 갑류(토목) 자격까지 얻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에도 참여하셨죠?
“국전기술공사에서 기술이사로 활동하던 시절이죠.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가 착공됐을 때 건설부의 ‘고속도로 기술조사 책임자’로 선정돼 ‘고속도로 기본계획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이 보고서에는 경부고속도로 설계 시 난공사가 예상되던 ‘대전-영동 구간’의 추풍령 일대에 대한 상세한 조사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지역을 조사할 때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혀 사전 답사부터 애를 먹었습니다. 이곳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난색을 표했던 구간이었죠. 군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원시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서울-부산 고속도로 건설공사 사무소장으로 근무하던 허필은 장군이 제가 만든 보고서로 대통령 결재를 받았죠. 이후 영동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의 건설에도 참여했습니다.” 황 동문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기여한 공로로 ‘제1회 도로의 날’ 산업포장을 받았다.

-동일기술공사는 언제 창립하신 건가요?
“창립은 아니고, 인수한 겁니다. 대학 선배셨던 최용환 대표가 경영을 맡으셨는데, 한국도로공사로 가시면서 저한테 인수를 제안하셨어요. 그 무렵 저는 제일기술단의 부사장으로 있을 때였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역사의 주인공들은 남이 만들어 준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며 무사안일하게 평생을 보내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자금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그 신념으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1970년 1월 동일기술공사를 인수했습니다. 1969년 한국도로공사 설립을 보면서 우리나라 SOC사업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엔지니어링 업체를 보면 공사 혹은 공단이란 명칭을 사용하는데 이유가 뭔가요?
“회사 업무가 주로 정부의 일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SOC사업을 수주해, ‘공공을 위한 공적 업무 수행자’란 차원에서 공사나 공단이라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링(기술용역)은 기본계획의 수립을 비롯해 타당성 조사, 기본 및 상세 설계, 기자재의 구매 및 조달, 시공감리 및 시운전에 이르기까지 특정 사업을 경제적이고도 안전하게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기술을 총칭한다. 그러나 1970년대 당시만 해도 엔지니어링의 범위는 넓지 않았다. 엔지니어링 생산원가(비용)는 총 공사비의 5~10%이며, 유지 관리 등을 포함한 총 사업비의 1~2%에 불과했다. 건설업에 대한 욕심은 없었을까?

“건설기술자 갑류(토목)(현 토목시공기술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건설업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엔지니어링과 건설의 시너지 효과를 구상하며 1973년 초 ‘합동건업’을 인수했습니다. 그런데 자금 흐름이 기술용역 일과 다르더군요. 발주사에서 발행한 어음이 제대로 순환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고생을 좀 했죠. 과감하게 건설업을 정리하고 엔지니어링 일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합동건업을 인수했다 실패하면서 얻은 교훈은 ‘돈을 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엔지니어링 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자이자 엔지니어로서 제가 발견한 돈이 나를 쫓는 방법은 새로운 기술 개발과 신용이었습니다. 동일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보유하고 있을 때 발주처들이 앞다퉈 동일을 찾았고, 동일이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잘 해냈을 때 그들이 다시 우리를 찾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라면.
“경부고속도로(낙동강-대림동, 언양-울산), 영동고속도로(만종-새말), 호남고속도로(전주-순천) 실시설계 등 전 국토를 일일생활권으로 연결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죠. 특히 1981년 대구-광주 고속도로(88올림픽고속도로) 실시설계는 동일의 위상을 크게 드높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전 구간에 대한 감리까지 수주했죠. 1984년 발주한 충남의 황산대교 가설공사 상부변경 설계는 당시 첨단 공법(ILM)을 도입한 대표적인 교량 설계입니다. 이어 의암대교, 안흥항 연륙교(신진대교)도 실시설계를 맡았죠. 그 밖에 지하철 4호선(서울역-삼각지 방향), 포스코 광양제철소 플랜트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근래에는 동부간선 지하화, 수서-광주 복선전철, 과천 우면산간 도시고속화도로 지하화 공사 기본설계를 맡았습니다.”  


6월 12일 엔지니어링의 날 기념식에서 황해근 동문이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동일기술공사는 인수 당시 10여 명으로 시작해 2024년 현재 750여 명의 조직으로 성장했다. 연매출액은 1000억원 수준. 서울 송파구에 사옥이 있다. 업계에선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회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계열사로 동성엔지니어링과 포장 전문건설업체 로드캐스트도 설립했다. 

-경영철학을 들려주세요.
“성실함,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또 회사가 잘 나간다고 해서 무리하게 회사를 확장하거나 사업을 다각화하지 않았습니다. 합동건업 인수의 뼈아픈 교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실경영에 주력하며 작지만 강한 회사, 재정적으로 튼튼하고 안정적인 회사를 지향했습니다. 은행 돈을 빌린 적이 없었고, 월급도 단 한차례 밀린 적이 없습니다.”

-엔지니어링공제조합 이사장으로 세 번 연임한 이력이 특이해 보입니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9년 봉사했습니다. 그 기간 법인카드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내 개인카드를 사용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업무에 임했죠.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면서 많은 조합원들을 만나려고 애썼습니다. 지금도 보람으로 느끼는 일이 통합정보시스템 구축과 보증업무의 전산화 그리고 해외지급보증서 발급이 가능하도록 보증상품을 개발한 일입니다. 정보화라는 패러다임으로 재편되던 시기에 다른 기업보다 먼저 정보화를 추구했다는 사실은 직원들의 사고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2002년 1050억원에 머물던 조합의 자산 규모는 2009년에 3231억원까지 증가했고, 2004년 이후부터 매년 조합원들에게 총 352억원의 현금 배당을 실시했습니다.”

-‘고유가 시대의 도로정책’을 집필하기도 하셨는데, 미래의 도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극심한 교통체증은 현대 사회의 암적 현상으로 반드시 극복돼야 할 사회적 과제지요. 교통 수요 관리(TDM, Transportation Demand Management)를 보다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자동차의 이용 억제 등에 대한 새로운 발상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야 하겠지요. 차 중심인 현재의 도로를 인간 중심인 친환경 도로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후배 토목인에게 한 말씀 들려주신다면. 
“토목 전문가로서 저는 나름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토목기술이야말로 생활의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토목 아닌 것이 하나도 없지요. 가정에서 매일 사용하는 상하수도에서부터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도로며 교량에 이르기까지 토목기술은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건 토목은 매우 중요한 인프라이고 그래서 토목이 발전해야 풍요로운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팩트입니다. 

캐나다의 엔지니어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 엔지니어의 소명의식이라는 행사를 통해 반지를 하나 받습니다. 반지의 면은 각이 지게 세공돼 있는데, 엔지니어들이 도면 작성이나 글씨를 쓸 때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가 바닥에 긁히면서 그들이 잘못된 선을 그리거나 계산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또 그 잘못과 오류가 초래할 참담하고 엄청난 결과를 한시도 잊지 말라는 뜻에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후배 엔지니어들이 높은 도덕심과 전문성 그리고 성실성을 갖춘 직업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길 바랍니다. 그것만이 토목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1935년 경북 경주 출생 △1954년 부산고 졸업 △1960년 모교 토목공학과 졸업 △1960년 농림부 공무원 임용시험 합격 △1961~1970년 국전기술공사 △1968~1969년 홍익대, 동국대 강사 △1970년 동일기술공사 창립 △1983년 한양대 산업공학과 공학석사 △1997~2000년 한국건설감리협회 회장 △2002~2011년 엔지니어링공제조합 이사장 △2013년 강원대 지역건설공학과 공학박사 △2002년 대한민국 건설기술인상 대상 △2024년 금탑산업훈장 △저서 『건설관리의 CM-CS 이론과 실무』(2002), 『고유가 시대의 도로 정책』(2004), 자서전 『오늘도 길에서 길(道)을 찾는다』(2022)


김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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