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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2017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그냥 끌려서 시작한 사진…언어 밖 세계 담고 싶었다” 한정식 중앙대 사진학과 명예교수

스테디셀러 ‘사진예술개론’ 저자…‘고요 시리즈’ 등 한국 추상사진 지평 넓혀


한정식 중앙대 사진학과 명예교수

“그냥 끌려서 시작한 사진…언어 밖 세계 담고 싶었다”




전남 영암의 도갑사 사찰 방을 담은 사진 한 장에 끌려 한정식(국어교육55-59) 동문을 찾았다. 최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작가 시리즈-한정식 고요전’에서 본 탁자와 전등만 있는 밝은 방 사진이었다. 지극한 적막, 평온이 느껴졌다. 모교 출신 중에 이런 사진 작가가 있었나. 아니 사진 작가가 몇 명이나 될까. 알고 보니 사진 분야 스테디셀러인 ‘사진예술개론’의 저자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사진을 한다는 사람 치고 ‘사진예술개론’을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예술사진의 토양을 만든 작가로 알려져 있는 한 동문을 ‘세계 사진의 날(8월 19일)’ 이틀 전인 8월 17일 서울 안국동 SK허브 개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고요 시리즈’ 등 한국 추상사진 지평 넓혀
스테디셀러 ‘사진예술개론’ 30년 넘게 롱런



-서울대 출신 사진작가가 드물기도 하지만 이렇게 유명한 작가가 계신 걸 몰랐습니다.
“유명하지는 않고요. 뭘 물어 보시려 오셨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도갑사 사찰 방 사진에 끌려 왔습니다.
“안목이 있으시네요(웃음). 대표작의 하나입니다. 제목을 ‘밝은 방’으로 붙였는데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란 사진론을 발표했지요, 그게 밝은 방이란 뜻인데 그 이름이 좋아 같은 이름의 동인지도 만들었어요.”


그의 사진 수필집 ‘사진 산책’에서 이 사진에 대해 이렇게 썼다.
‘텅 빈 방에는 밥상으로 쓰는 거겠지만 깨끗한 상이 하나 있고 천장에 전구 하나가 뎅그러니 매달려 있었을 뿐 정말 절답게 소박하고 정갈한 방이었다. 적료, 적정 등의 글자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셔터를 눌렀다. 내 사진 중에 아직까지 이보다 나은 사진은 별로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사진은 마음에 든다.’


-그 사진 기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장학금으로 활용하려고요.
“할 수 있는데, 다만 문제가 사진이 안 팔려요. 그 사진도 두어 장 팔렸나. 내 사진은 트렌드에서 멀리 있어요.”


-트렌드 영향을 받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예술 시장은 트렌드가 있어요. 그림이든 음악이든 사진이든.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가 아니라서….”


-작품에 에디션 번호가 없는 것 같아요.
“사진은 무한복제가 특성인데 막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판화는 닳기도 하니까 에디션을 달지만 필름은 닳지 않잖아요. 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에디션 번호를 달 필요를 못 느껴요, 컬렉터들이 원하니까 할 수 없이 매길 때도 있지만.”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에 꽤 많은 작품을 전시했더라고요.

“99점 전시했어요. 폭 120 cm 가 넘는 대형 작품도 여러 점 걸었습니다. 회고전 성격이 담긴 제 생애 가장 큰 전시였습니다.”




전남 영암 월출산 도갑사, 고요 시리즈 중, 1986



-작품이 모두 흑백사진입니다. 컬러사진은 안 하세요?
“사진을 배울 때 컬러 사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영향이 큽니다. 흑백만 하다 보니 익숙한 것으로 진행해 왔어요. 컬러사진을 통해 제 길을 찾으려면 10년 이상 붙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 시간도, 여력도 없으니 흑백으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초창기 ‘북촌’ 사진을 보면 인물도 간간이 나타나는데 그 이후에는 나무, 물, 발, 풍경 등을 많이 찍으셨어요.
“자연이 심성과 맞는 것 같아요. 나한테 덤벼들지 않으니까(웃음). 임응식 선생님에게 사진을 배웠습니다. 이분은 ‘사진은 리얼리즘이다, 인간의 삶을 찍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지요. 사진의 기록적 가치에 큰 의미를 두셨죠. 그런데 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사람을 찍을 수 없었어요. 부딪히는 걸 싫어하는 성미예요. 외로운 길을 걸어왔지요. 사진의 정체성을 기록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은 하면서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쪽으로는 눈이 가지 않았어요.
내 사진은 50대까지는 문학성에 많이 기댔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상의 매력이 약했지요. ‘사진이 시각예술임을 무시했구나’ 그런 깨달음이 들더군요. ‘고요’ 시리즈가 이런 깨달음 이후 시작됐습니다. 그러면서 사진의 추상성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추상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고.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언어 밖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음악을 좋아하는데 쇼스타코비치, 말러의 곡을 들으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옛 선배들의 음악을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했거든요. 난 뭘 했나,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사진을 보면 불교적인 느낌이 많이 듭니다.
“절은 자주 못 가지만 불교신자예요. 법륜스님이 계신 ‘정토불교대학’에서 2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경전 중에서는 금강경을 좋아하고요.”


-주로 사용하는 카메라는 뭔가요.
“핫셀블라드(Hasselblad 중형)와 라이카 많이 써요. 렌즈는 사진 보면 알겠지만 망원렌즈를 주로 사용합니다.”


-디지털 카메라는 안 쓰세요?
“아직요. 휴대폰도 스마트폰으로 바꾼 지 얼마 안 됐어요.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기는 해야 할 텐데…. 생각중이에요. 이번 전시회 큰 작품들은 디지털 인화했어요.”


-카메라가 무거워 몸에 무리가 많이 갔을 것 같은데요.
“발바닥이 좀 아파요. 족저근막염이라고 하나. 사진 촬영 때 동행해 주는 후배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카메라도 작은 것으로 바꾸려고요.”


-지금까지 찍은 사진은 디지털화해서 보관하고 계신가요?
“안 했어요. 필름 파일만으로 보관하고 있어요. 버린 것도 많아요. 제자들이 ‘왜 버리시느냐 자료로 남겨둬야 한다’고 야단도 쳐요. 재미있는 것은 예술사진이라고 찍은 것 중에는 부끄러운 게 있어 버리지만 제 아이들 어릴 때 사진은 아무리 서툰 사진이라도 버리지 못해요.”


기념사진의 가치와 관련해 그의 수필집 ‘사진 산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기념사진은 사진 중의 사진이다. 작품이고 아니고를 떠나, 사진의 원점에 기념사진은 선다. 사진학과 학생 중에는 소위 작품을 한답시고 소소한 기념사진은 우습게 아는 이가 적지 않다. 소위 예술사진으로 불리는 작품은 없어질지 몰라도 초상사진은 사라지지 않는다.”


-국어 선생님에서 사진가로 변화하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대학 시절만 해도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내 사람됨이 퍽 단순하고 직선적이어서 소설에는 안 맞았어요. 대신 시를 썼죠. 집이 가난해서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수 있는 길을 찾았지요.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서울사범학교를 나왔어요. 어떻게 서울대까지 졸업할 수 있긴 했지만. 보성고등학교에 있을 때 돈을 모아 가장 먼저 산 게 카메라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냥 끌렸어요. 우연히 중고 카메라를 장만하고 동료교사였던 홍순태(상학56-60) 씨에게 끌려 사진의 길로 들어서게 됐죠. 홍순태 선생이 아마추어 사진동아리 ‘백영회’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취미로 그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렇지요. 1975년인가, 지금은 서울예전 명예교수인 육명심 선생의 부탁으로 명지전문대 디자인과 학생들에게 사진 강의를 하게 됐어요. 말도 안 된다고 손사래를 여러 번 쳤는데, 끈질기게 설득하셨어요. 그렇게 되면서 사진 이론 공부를 하게 됐고, 우연한 기회에 일본에서 사진 배울 기회가 주어져 떠났습니다. 다행히 아내가 흔쾌히 받아들이고 도와주는 바람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운이 많이 따랐습니다. 그렇게 가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때만 해도 사진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임응식, 이명동 선생을 비롯해 사진계 선배 몇몇 분이 남들의 시선 의식 않고 진지하게 사진을 하고 있었지만 일반적 인식은 물론, 미술계를 비롯한 문학이나 음악 등 타 분야에서도 사진은 그냥 판박이 기술이지 예술은 아니라는 인식만이 팽배했지요. 사진이라는 외로운 길에서, 더욱이 추상 사진의 길을 걸어갔으니 제가 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사진 분야 스테디셀러인 ‘예술사진개론’도 쓰셨어요.
“1986년 책을 썼는데, 사진 이론에 대한 갈망이 컸고, 내가 그 갈증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지 국내에 제대로 된 사진 이론서가 없었습니다. 당시 생각에 3판 정도 인쇄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지금도 나와요. 한 달 만에 재판을 찍었고 매년 2,000부 정도 나갔던 것 같아요. 더 좋은 책이 나올 줄 알았는데 사진을 폭 넓게 공부하는 사람이 우리 때보다 적은 것 같아요. 젊은 친구들이 너무 좁게 사진을 배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책이 30년 이상 나오니 개인적으로 보람된 일이지만, 한국사진계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진의 매력은 뭔가요.
“사진은 만남의 예술입니다. 만나지 못하고서는 찍히지 않아요. 만남은 사람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에요. 모든 사물은 만남을 통해 비로소 보입니다. 그(그것)가 거기 있음이 보일뿐 아니라, 그가 왜 거기 있는가가 보이고, 무엇인가가 보이고, 내게 있어서의 그의 의미가 보입니다. 내가 그를 느끼는 순간 그도 나를 느낌을 내가 느껴요. 순간적으로 셔터가 눌리고, 한편의 시 같은 사진 한 장이 탄생할 때 기분은 형언할 수 없죠.”


-가을 촬영지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계절색이 드러나는 사진을 많이 안 찍어서 특별히 추천할 곳은 없어요. 요즘 ‘가을에서 겨울’이라는 주제를 갖고 집 주변 풍경을 간간이 찍어요. 늙어가는 제 인생을 투영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따로 할 말은 없고, 그저 지금처럼 꾸준히 사진이나 하면서 살 생각이지만 무엇보다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건강이 얼마나 버텨 줄지는 몰라도. 사진이 이제는 나의 삶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요.”

김남주 기자






한정식 동문은


작가, 교육자, 그리고 이론가로서 척박했던 한국사진계를 풍요롭게 일궈왔다.
기록성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 사진이 주를 이루던 한국현대사진사 속에서 ‘형식주의 사진’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며 사진매체의 예술적 가능성을 넓혀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8년 고 홍순태(상학56-60) 작가가 조직한 아마추어 사진동아리 ‘백영회’ 활동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진에 입문 후 1976∼1978년 일본대 예술학부 예술연구소(사진 전공)를 수료했다.


1978년 첫 개인전을 비롯해서 여러 차례 개인전과 사진집을 냈고, 신구대학 사진과 전임강사를 거쳐 1982년 중앙대 예술대학 사진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 1986년 첫 번째 이론서인 ‘사진예술개론’을 출간하고 1987년 한국 최초의 사진학회인 ‘카메라 루시다’를 창립하는 등 교육자이자 이론가로서의 삶도 함께 살아왔다. 오상조, 권태균, 강용석, 정주하, 구본창, 김아타, 이용환 등이 ‘카메라 루시다’ 동인이었다.
50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나무’, ‘발’, ‘풍경론’, ‘북촌’, ‘고요’ 등 다양한 시리즈를 통해 꾸준히 사진이 가지는 ‘추상성’에 대해 탐구해 왔다. 저서로 ‘사진예술개론’과 ‘현대사진을 보는 눈’, ‘사진과 현실’, ‘사진, 예술로 가는 길’, ‘사진 산책’, 역서로 ‘예술로서의 사진’이 있다.


대학생 시절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포플라’로 입선한 문학도였다. 졸업 후에는 강남중, 명지고, 보성고, 휘문고 등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세 아들 중에 두 아들 내외가 모교 같은 과 커플이다. 장남 한계영(의학86-92 강원대 의대 정형외과 교수)·며느리 이종희(의학92-98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피부과 교수) 부부, 둘째 한계륜(서양화89-93 서울과기대 조형대학 교수)·며느리 박소영(서양화92-96)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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