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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호 2023년 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G2 중국 배경엔 화상, 글로벌 한국경제 뒤엔 한상이 있다”

하기환 (전기공학66-70) 한남체인 대표

“G2 중국 배경엔 화상, 글로벌 한국경제 뒤엔 한상이 있다”


하기환 (전기공학66-70)
한남체인 대표



1992년 LA 폭동 때, 총 들고 앞장서 폭도 막아
폭동 진정 국면엔 ‘평화 대행진’ 실행

10월 열리는 세계한상대회 대회장 맡아
한민족 국제경쟁력 높이는 역할 할 것



대담·글 : 박용필 (사회복지66-73)
미주동창회보 편집고문



하기환 동문과의 인터뷰는 예정보다 거의 1주일 가량 늦어졌다.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자 며칠 후에나 답장이 왔다. “지금 콜로라도 스키장에 있는데….” 70 중반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스키라니 믿기지 않았다. 몇 번이나 큰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모굴’이나 ‘트리’와 같은 난이도 높은 스키를 즐기고 있다. “스키협회 회원 50명과 함께 갔는데 내가 최연장자였어요. 하지만 아무도 나이 많다고 무시하지 못해요. 기술로 날 따라올 사람이 없으니까(웃음).” 승부사의 기질이 비즈니스에서뿐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진하게 묻어났다. 어렵사리 하 동문을 LA 한인타운에서 만났다. 강한 햇살이 흰눈에 반사된 탓인지 얼굴이 불그스레 타 있었다. 하 동문의 사무실은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다. 1층은 순두부 식당에 세를 줬다. 미주 한인사회의 ‘슈퍼리치’ 답지 않게 오피스는 초라했다. 10평 남짓 될까. 천으로 된 소파는 나이가 족히 20살도 넘어 보였다. 스키는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몸을 곧추 세웠다.


-세계한상대회 대회장을 맡았다. 한상의 정의가 무엇인가.
“한상(韓商)은 한인기업인, 재외동포 경제인을 아우르는 말이다. 전세계 750만 재외동포 가운데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이 한상이다. 이 한상들이 1년에 한번씩 모여 교류하고 정보를 나누는 비즈니스 컨벤션이 바로 세계한상대회다. 한상이 왜 중요한지는 화상(華商)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이 G2로 급부상한 숨은 세력이 바로 화상 아닌가. 유대상인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로스차일드, 모건, 록펠러 등 유대상인집단이 인류경제에 끼친 영향력은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올해 처음으로 해외에서 열린다고 들었다.
“금년이 제21차 대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서울, 제주, 부산, 울산 등지를 오가며 모두 한국에서 열렸는데 올해 처음으로 해외, 그것도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개최된다.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에서다.”

-꼭 한상만 참가하나.
“아니다. 세계 각지의 해외동포 경제인들과 한국의 중견기업인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해 상생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민족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국제 비즈니스 컨벤션이다. 올해는 미 주류기업들의 참여도 예상된다. 개최지가 하이텍의 메카인 캘리포니아인 만큼 한국의 스타트업이 대거 참가할 것 같다. 애너하임 컨벤션센터는 전시장 면적이 7만6000평방미터에 달한다. 1, 2 층을 다 사용할 계획이다. 입지조건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디즈니랜드가 바로 이웃해 있다.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도 그리 멀지 않다. 골프장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로스앤젤레스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을 두번씩이나 했다. 상공인들도 따지고 보면 한상 아닌가.
“맞다. 이번 한상대회도 상공회의소가 중심이 돼 치른다. 내가 처음 회장이 된 것은 1992년이다. 한마디로 열악했다. 회원을 크게 늘리는 한편 미 주류사회와의 연대감을 높이기 위해 정기적으로 ‘믹서(Mixer)’를 열었다. 한인들과 주류사회 경제인들이 한데 어울리는 행사다.”

-무엇보다 하기환 하면 LA폭동을 빼놓을 수 없는데….
“한인 이민역사상 최악의 사태를 겪었다. 1992년 4월 29일, 이른바 ‘사이구’는 하기환이 새로 태어난 날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터다. 당시 한인회장은 내부 분열로 공석이나 다름없었다. 총영사관에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열렸다. 내가 만장일치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이 자행됐다. 자칫 우리가 맨손으로 일군 타운이 잿더미가 될 상황에 내몰렸다. 라디오에선 ‘매우 위험한 상황이니 빨리 문닫고 귀가하라’는 방송이 반복돼 나왔다. 나는 방송국을 찾아가 거칠게 항의했다. ‘무슨 소리냐. 우리 일터는 우리가 지켜야지.’ 그러고는 ‘(집에 가지 말고) 우리가 타운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분위기가 반전됐다. 나도 권총을 챙겨 쌀과 자동차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는 지붕에 올라가 공포탄을 마구 쏘아댔다. 타운 상인들도 모두 무장한 채 나를 따라 폭도들과 대치했다. 결국 시위대는 더이상 접근하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소방 당국은 날이 어두워지면 폭도 수백명이 공격을 할 거라며 대피를 권했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군이 투입돼 혼란한 상황이 다소 진정될 기미를 보이자 ‘평화 대행진’ 아이디어를 내놨다. 안전문제로 반대가 심했지만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수만명의 우리 동포들이 쏟아져 나와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에 참여, 미 주류사회에 깊은 울림을 줬다. 폭동이 진압된 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이 타운을 찾았다. 나는 연방차원의 재정지원을 강력히 요구해 대부분 관철시켰다. 피해 복구가 빨리 이뤄진 배경이다. 나는 지금도 폭동에서 타운을 지켜냈다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낀다.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만의 나라가 아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회장도 두 번씩이나 했다.
“폭동을 경험한 나로서는 무엇보다 우리 내부의 결속은 물론 주류사회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2000년 처음 출마한 회장선거에서 상대후보를 더블 스코어로 물리쳐 ‘직선회장’이라는 명예를 거머쥐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스테이플스 센터(프로농구 LA 레이커스 홈구장)를 빌려 한인 수만명이 참가해 응원전을 펼친 것도 내 이력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시 관계자들을 설득해 단돈 1달러를 주고 그 큰 실내 경기장을 빌렸다. 폭동으로 얼룩진 한인들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가 됐다고 자신한다.”

-뒷말 많은 단체장을 두루 섭렵했다. 욕 많이 먹고 적이 생기는 커뮤니티 활동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폭동이 일어났을 때 전화 한 통 넣어서 도움을 청할 곳이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한인 커뮤니티가 미국사회에 정치력을 키워야 하는데 내가 30년 넘게 각종 단체 활동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얼마든지 파워를 키울 수 있는데도 결집되지 않으니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커뮤니티 힘을 기르는 데 인색하면 안 된다.”

-왜 사서 욕을 먹는가. 적당히 타협하면 될 텐테….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는 말을 가끔 듣지만 나는 성격적으로 그러질 못한다. 손해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약속은 꼭 지켜야 하고 의리 있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린다. 지난해 한인타운의 노숙자 쉼터 경우만 해도 그렇다. 우리만 잘 살고 주변의 타 인종이나 소외된 계층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노숙자들에게 점퍼와 담요, 텐트 등 도움의 손길을 주던 우리가 정작 이웃에 홈리스 셸터가 들어온다고 하니 거의 광적으로 반대운동을 했다.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행동인가. 한인사회가 ‘님비(NIMBY, Not in my backyard)’의 대표적인 커뮤니티로 인식될까 두려워 셸터의 입주를 지지한 것이다.”

-하 동문의 이같은 노력이 결국 보상을 받았다. LA 한인타운 한복판에 ‘하기환 박사 광장(Dr. Kee Hwan Ha Square)’이 생기지 않았는가. 훈장도 받고….
“지난 2013년 LA 시의회 결의로 내 이름을 딴 광장이 생겼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을 거 같다. 우리 동포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2020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훈포장 가운데 가장 훈격이 높다고 들었다. 훈장을 받은 것으로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내 이민생활을 결산한 셈이라고 할까.”

-박사학위 소유자다. 공학박사, 그것도 명문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에서 받았다.
“석사는 위스콘신대(매디슨), 박사는 UCLA에서다.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교수로 임용되기 직전 방위산업체인 ‘휴스 항공사’에서 잡 오퍼를 받았다. 그래서 경험을 쌓고 귀국하겠다는 것이 그냥 미국에 눌러 있게 된 것이다. 1년 남짓 일했는데 매우 ‘보링’ 곧 무료했다. 일에 흥미를 잃고는 집어치웠다. 힘들게 공부해 학위를 땄는데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나는 전혀 후회가 없다. 후회했다면 지금의 부를 쌓았겠는가. 부동산 투자와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얼마 안 돼 LA의 노른자위인 윌셔가의 고층빌딩을 두개나 사들이는 등 큰돈을 벌었다. ‘하 회장이 만지면 돌도 노다지로 변한다’는 우스개가 돌아다녔다. 소위 ‘마이더스 터치(Midas Touch)’라는 것이다. 1988년인가. 대형 슈퍼마켓인 한남체인을 인수했다. 80만 달러쯤 준 것으로 기억한다.”

-한때 ‘폭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다(웃음). LA폭동과 지진, 불경기 등이 겹쳐 부동산이 거의 모두 내 수중에서 떠나버렸다. 그런데 우연히 사들인 한남체인이 재기의 발판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은 매장이 7개로 늘어났다. 연매출은 2억 달러가 넘는다. 내겐 ‘캐시카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부동산 투자와 개발이 본업이다. 얼마전 텍사스 댈러스의 초대형 쇼핑몰을 사들였다. 6300여 대의 주차시설을 갖추고 있다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몰을 제2의 한인타운으로 만들 꿈에 부풀어 있다.”

-작년 11월 서울대 동창회가 주관한 라스베이거스 나눔 골프대회에 참가해 많은 동문들이 놀랐다. 못 올 상황이 아니었나.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내 생활 신조 때문이었다. 서울 출장에 다녀온 그날 저녁 LA공항 인근에서 열린 에어 프레미아 갈라 행사에 참석했다. 새벽에 일어나 자동차로 거의 4시간을 달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거의 잠을 못 잔 상태에서 운전했다. 티오프 시간이 오전 10시여서 서둘러야 했다. 동창회에 참가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했던 것이다. 내 모교 행사 아닌가. 나는 신생 하이브리드 항공사인 에어 프레미아에 투자자로 참여했다. 올 상반기 보잉 점보기 2대를 추가 도입해 뉴욕노선에도 취항한다.”

-서울대 동문들에 당부할 말씀은?
“많은 우리 동문들이 이번 한상대회에 참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LA를 비롯한 남가주에는 많은 서울대 동문들이 살고 있다. 창업을 했거나 할 예정인 동문들은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동창회에서도 창업 지원 및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