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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호 2022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리더는 트렌드 읽고 방향 제시하는 사람”

김해련 (AMP 79기, AIP 63기)

“리더는 트렌드 읽고 방향 제시하는 사람”

김해련 (AMP 79기, AIP 63기)
태경그룹 회장




뉴욕서 디자인 공부 뒤 29세 창업

국내 첫 인터넷 의류쇼핑몰 오픈

데이터 경영으로 5000억 매출 이뤄
관악경제인회 상임부회장도 맡아



대담 : 방문신 (경영82-89) SBS문화재단 사무처장


김해련 동문은 첫 번째 또는 1호의 이력이 많다. 미국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뒤 29세의 젊은 나이에 여성복 브랜드를 창업했고 199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터넷 의류 쇼핑몰 ‘패션플러스’를 만들었다. 소비자 패턴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국내 1호 트렌드 컨설턴트이기도 하다.

그렇게 창업주로서 20년간 활동했고 2012년부터는 부친이 운영하던 태경그룹에 합류해 회장직을 맡고 있다. 20년간은 창업주로서, 10년간은 창업주 2세 CEO로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대와의 인연은 부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부친인 고 김영환 회장이 서울대 상대 상학과(현 경영학과, 54학번) 동문이다.

김해련 회장은 학부는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서울대 AMP(최고경영자과정)를 통해 동문의 인연을 맺게 됐다. 8월에 공식 출범한 관악경제인회의 상임부회장에 추대됐고, 신임 서울대 총장 후보자를 선정하기 위한 총장 추천위원을 맡고 있다.

본인 스스로 “사업가 DNA가 항상 꿈틀거린다”고 할 만큼 김 동문의 가장 큰 강점은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는 남다른 촉이다. 서울대 사람들의 조직은 ‘망하지는 않지만, 혁신다운 혁신은 없는 게 대부분’이라며 쓴소리도 덧붙였다. 최근 한국경영학회가 수여하는 혁신경영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 동문에게 여성 창업자로서, 경제인으로서 걸어온 길과 미래의 비전을 들어보았다.

-대학 졸업 후 뉴욕에 유학 가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고 국내에 돌아와 29세에 첫 창업을 하셨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뛰어든 건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했어요. 기업가적인 성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남편이 미국 뉴욕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 공부 중이라 저도 뉴욕 페이스대학에서 MBA 과정을 밟았습니다. 자체 공장 없이 브랜드만으로 성공을 거두는 나이키의 경영사례가 당시 큰 이슈였습니다. 거기에 자극을 받아 브랜드 사업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MBA 후 뉴욕주립 패션 공과대학(FIT)에 입학해 패션을 공부했습니다. 샤넬 등 디자이너 브랜드를 꿈꾸며 공부한 거죠. 귀국 후 아버지로부터 종잣돈을 받아 지하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아드리안느’라는 여성 패션 브랜드를 시작했습니다. 29세 때입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패션 브랜드를 어디에 입점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고 주변에 물어보니 신세계 백화점 본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수입이 허용 안 돼 해외 명품 브랜드가 백화점에 없었습니다. 무작정 백화점 매입부 담당자를 찾아가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입점 의사를 밝혔죠. 막 웃더라고요. 경험도 없고, 샘플 몇 개 갖고 와서 뭘 하겠냐는 거예요. 그래도 당시 미국 MBA에서 공부하고 FIT를 나온 젊은 여성이 패션 브랜드를 한다고 하니 무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우리가 신세계 이미지도 올려주고, 신규 고객을 창출할 수 있다’, 그렇게 입점해야 할 이유를 정성껏 준비해 가니까 담당 부장님이 감동하는 눈치예요.
첫 미팅 후 3개월 지나 연락을 받았습니다. 조그마한 매장이 석 달 정도 빌 것 같은데 한번 장사를 해보라고요. 그렇게 신세계 본점에 입점해 3개월 열심히 했더니 전체 브랜드 중에 중간 정도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신세계는 물론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까지 정식 입점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됐죠. 8년 정도 아드리안느 브랜드 사업을 하다, IMF 사태를 맞아 여기저기 백화점들이 무너지고, 수입 브랜드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좀 어려워졌어요. 한 달 1억원 매출이 3000만원으로 떨어지고, 재고가 쌓이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죠.
그때 우연히 삼구(39)쇼핑(현 GS홈쇼핑)의 지인이 찾아와 옷을 팔아보라는 거예요. 본인들도 프리미엄 브랜드를 팔고 싶다는 겁니다. 이렇게 비싼 브랜드가 홈쇼핑에서 팔릴까 했는데, 30~40% 할인된 가격에 판매를 하니까, 1시간 만에 재고가 동이 나더라고요. 그때 매장 없이 무인 판매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컴퓨터를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신촌 중앙정보처리학원에서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1997년쯤 이야기예요. 그때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업들이 막 생겨날 때지요. 검색사, MS오피스 자격증을 땄어요. 친한 친구 네 명이 공교롭게도 인터넷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이메일도 비교적 초창기에 쓰기 시작했고, 이 분야에 일찍 눈을 떴습니다. 친구들에게 내가 요즘 홈쇼핑에 입점해서 옷을 팔고 있는데, 인터넷으로도 확장하려고 한다고 하니 당장 하라는 겁니다. 아마존을 알려주면서 ‘여기가 요즘 핫한 온라인 서점’이라면서 옷도 분명 잘 팔릴 거라고 응원을 해 줬어요.
아마존에서 책도 사보고, 6개월간 인터넷 비즈니스 교육을 받은 뒤 19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온라인 의류 쇼핑몰인 ‘패션플러스’를 창업했죠.
2000년대 초반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도 받고, 주식 상장 기대도 컸었는데, 그러지는 못했어요. 온라인 의류 쇼핑몰도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면서 레드오션이 돼 버렸지요. 주식 상장을 기대했는데, 못하고 매각한 게 좀 아쉽죠. 패션플러스를 대명화학(회장 권오일 심리81-85)에 매각할 무렵 800억 매출을 기록했는데, 지금 4000억원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매각 후 트렌드 컨설팅 회사를 인수해, 소비자 트렌드라는 영역을 개척해 기업 컨설턴트로 활동을 했죠.”

-창업 경력이 20년 정도 되고, 2012년 태경그룹에 합류해 10년 되셨네요. 이런 경력이 흔치 않은데, 처음부터 부친의 사업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30년 전 아버지 사업도 큰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연세가 50이 채 안 됐을 때죠. 그때 제 나이는 20대 초반이었고요. 제가 당시 가서 할 일도 별로 없었죠. 29세에 제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내가 잘 돼서 아버지 사업을 인수하겠다고요. 아버지도 늘 ‘우리는 좋은 비즈니스 경쟁 상대’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지만, 저는 천상 창업을 해야 하는 DNA를 타고났다고 생각해요. 누구 밑에서 관리를 받으면서 사는 스타일이 못 됩니다.”

-2014년에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태경그룹을 이끌어 오신 지 대략 8년 됐죠. 경영 철학이 궁금합니다.
“변화, 혁신이죠. 그런데 그에 앞서 소재 산업에 대한 기초가 부족하잖아요? 이곳에 와서 화학 공부를 좀 해야겠다 싶어 송원장학회 학생 중 서울대 대학원 과정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약 2년간 매주 월요일 2시간씩 기초 화학 교육을 받았어요. 큰 도움이 됐지요. 기본적으로 그렇게 공부하고 계속 고민을 했죠.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진 그 시기, 태경그룹도 정체됐습니다. 사업 아이템들도 시대에 뒤처진 것들이 많았고요.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회사를 변화시켜야 할까, 지속 성장을 위한 사업 재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초창기부터 심어온 ‘공익, 공존, 공영’ 정신 위에 회사를 혁신할 수 있는 슬로건을 네 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R&D 마인드, 두 번째 혁신, 세 번째 소통, 네 번째 데이터 경영입니다. 하나로 요약하자면 스마트 경영인 셈이죠. 그 네 가지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과거 모든 자료를 전산화시켰습니다. 공장도 스마트 팩토리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데이터 경영이 완성됐죠. 인사고과에서 데이터 경영 지수가 가장 중요합니다. ‘데이터 없는 이야기는 내 앞에서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혁신팀도 새로 만들었어요.”

-태경그룹 소개를 해 주신다면.
“회사 캐치프레이즈가 ‘소재로 세상을 바꾸다’입니다. 1975년 설립돼 반세기 가까이 선진국이 독점하고 있던 기초 소재를 국산화하고 세계화하는 데 앞장서 왔습니다. 반도체, 철강, 조선, 화학, 제지, 화장품 등 모든 국내외 기간산업 분야에 기초 소재를 개발, 제공하고 있습니다. 드라이아이스와 액체탄산가스, 생석회 등 13개 제품은 국내 1위입니다. 종이에 넣는 첨가제 ‘아스트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제품이며 그 외에 5개 제품을 국내에서 독자 기술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연매출 5000억원 규모로 10여 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고요.”

-서울대에서 AMP는 물론 AIP, SPARC 등 세 개 과정을 이수하며 인연을 맺었습니다. 회장님이 경험한 서울대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서울대 총장추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가서 보니 서울대가 시스템화되지 않은 게 너무 많더군요. 총장을 뽑는다고 하면 후보들의 데이터가 일목요연하게 쫙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후보가 그동안 했던 일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끔 데이터베이스화해 둔 게 없냐’, 물었더니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 최고 지성이 모여있는 서울대의 인사·참여 시스템을 혁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서울대 총장의 제1 요건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말씀드렸다시피 혁신, 또 혁신입니다. 서울대 사람들이 잘 안 변해요.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 출신들이 변하면 우리나라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겸손이라는 의미가 아니고요. 어린애한테도 배울 게 있다고 하잖아요? 개방적 사고와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서울대 출신들이 많이 해줘야 돼요. 우리 회사에도 서울대 출신이 많은데, 닫혀있는 분들이 있어요. 제가 오죽하면 ‘서울대 출신 대표들은 회사를 절대로 망하게 하지는 않는데, 회사를 혁신시키지도, 발전도 못 시킨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해요. 생각도 많고 틀을 잘 못 깨요. 뭐랄까, 전문가는 많은데 창업가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새로 출범한 관악경제인회 상임 부회장으로 선임되셨습니다. 어떤 것을 하고 싶으신가요.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세대 간 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갭이 커요. 경영자들이 젊은 세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MZ세대에게는 공정한 보상이 중요합니다. 사고를 전환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 친구들의 장점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사회는 많이 변했어요. 그 변화를 무시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관악경제인회 회원 되시는 분들이, 꼰대적인 사고를 버리고 어떻게 그런 친구들의 장점을 활용해 전체적인 파이를 키울 것인지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송원 김영환 장학재단이 설립된 지 오래됐지요? 설립 취지를 들려주세요.
“아버지가 서울 상대 다니실 때 워낙 고생하셔서 ‘내가 나중에 돈을 벌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겠다’는 생각이 강하셨어요. 기업을 한 목적에 장학사업이 큰 부분일 정도로요. 그런 연유로 장학생 선발기준도 가정 형편입니다. 1983년 설립돼 지금까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학생 등 816명에게 120억원을 지급했습니다. 매년 85명의 대학(원)생에게 1000만원을 주는데, 다른 장학금과 중복 수혜가 가능합니다. 집안을 책임지는 장학생들이 많아서 중복 수혜를 해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5년에는 화곡동에 기숙사를 마련해 지방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장학재단 외 관심 있는 사회공헌 분야가 있다면.
“사회공헌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직원들이 좀 더 행복해지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크죠. 더 나아가 직원들이 비전을 가지는 게 중요하잖아요?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지속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미래 트렌드를 읽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혁신하면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직원, 회사, 국가가 함께 성장해 나가야죠. 회사가 지속 성장 발전하는 게 진정한 사회적 공헌이 아닐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서울대 학생들에게 한 말씀 들려주세요.
“기부 마인드를 학생 시절부터 가졌으면 합니다. 기부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죠. 그런데 학생들이 끼리끼리 모이다 보니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잘 몰라요. 서울대 안에 어려운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고요. 우리 장학생 가운데 서울대생이 많이 있어요. 대부분 가정 형편이 지극히 어려운 학생들이죠. 이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알게 모르게 주눅 드는 것 같아요. 이런 친구들이 네트워크가 좀 약하죠.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의식적으로라도 함께 어울리는 훈련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것들이 생활화돼야 사회 나와서도 참 리더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엘리트주의를 커버할 수 있는 활동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정리=김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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