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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호 2021년 1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딱 만났을 때 내공 느껴지는 통상 인재 키워야 산다”

유명희 경제통상대사·전 통상교섭본부장


“딱 만났을 때 내공 느껴지는 통상 인재 키워야 산다”
 
유명희 경제통상대사·전 통상교섭본부장

 


새로운 세계질서는 ‘다같이’ 아닌 ‘우리끼리’
자유무역·열린 시장경제 국가들과 함께 가야
 
WTO 사무총장 선거때 ‘한국은 무소속국가’ 느껴
우수 인재 지원 늘려야 국제기구서 힘 커져
 
 
#1.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요구해왔다. 협정 폐기까지 운운하며 일방적으로 많은 요구 조건을 내걸었지만, 2018년 더 커진 상호 이익과 신뢰 관계를 재확인했고 네다섯 가지 이슈에 대해서만 조율, 3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2. 2013년 우리 정부는 후쿠시마현을 포함한 인근 8개 지역에서 잡힌 모든 일본 수산물에 수입금지 조처를 내렸다. 일본은 이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고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2019년 2심이자 최종심에서 1심이 뒤집혔다. 일본 환경의 유해성뿐 아니라 환경이 식품에 미치는 영향을 입증한 것. 국내 환경단체는 “국민 안전이 승리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대한민국 통상 외교가 걸어온 굵직굵직한 길목마다 유명희(영문86-90)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있었다. 한미 FTA 최초 협상 때 과장급으로 참여했고, 재협상 땐 수석대표를 맡았다. 통상교섭본부장 취임 후엔 일본 수산물 분쟁에 서 역전승을 이끌며 거듭 실력을 증명했다. 30년 통상 외길을 걸었으며, 아세안 10개국을 비롯해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총 15개 나라가 참여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타결을 이끌었다.

작년엔 WTO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해 결선까지 진출, 외교통상 종사자뿐 아니라 전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 9월 경제통상대사에 임명된 그는 정부와 기업 간 소통을 촉진하고 국내외 통상 인사를 만나 자문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사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11월 1일 본회 회의실에서 유명희 동문을 인터뷰했다. 유 동문은 “이희범 회장님께 여기 다녀갔다는 문자를 보내도 되냐”며 친근함을 드러냈다.


-당선됐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국제 선거를 나가 보니 우리나라는 ‘무소속이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아프리카 소속 44개 회원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았어요. 국내로 치면 영남·호남 지역에서 ‘묻지마 투표’를 해주는 식이죠. 반면 저는 각국의 통상 장관을 한 명 한 명 만나 설득해야 한 표 한 표가 확보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지막에 후보직을 내려놓을 때도 떨어졌다는 상심보다 뿌듯함이 컸습니다. 상당수 국가들이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더 큰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훌륭한 선거 캠페인이었다고 격려해줬어요. 수십 년간 통상 업무를 하는 동안에도 직접 접촉한 나라는 40여 개국 정도인데 선거 과정에서 100개국 이상의 통상 장관과 온·오프라인으로 만나 대화했습니다. 잘 몰랐던 나라에 대해 공부도 많이 했고요.”

-가족사로 한국을 대변한 선거 유세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교과서 같은 딱딱한 내용 말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찾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가족 얘기를 하게 되더군요. 제 아버지는 중동에 나가 공장을 건설, 운영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4남매를 국내에 두고 한 10년 동안 해외 근무를 하셨죠.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들 대학 교육까지 다 시켰고요. 당신 딸이 세계를 누비며 다자 무역 질서를 복원하는 일에 기여할 줄은 상상도 못 하셨을 겁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발전한 거죠.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아들은 무슨 밴드를 한다며 공부는 안 하고 밖으로 돌았어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베이징 시내에 있는 록 카페를 찾아 잡으러 갔는데, 러시아인 가수에 스위스인 드러머, 프랑스인 기타리스트와 함께 아들이 베이스기타를 치고 있더군요. 그 화음이 너무 아름다워 혼내러 갔다가 도리어 감동을 받아 노래를 따라 부르기까지 했죠. 아들이 다른 나라 친구들과 함께 공연하는 그 모습이 조화로운 세계화의 모습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중공업-외교통상-케이팝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업(業)을 통해 한국의 발전된 역량을 생동감 있게 알리는 것은 물론 많은 나라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죠.”

-30년 통상 외길을 걸으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성과는 무엇인지.
“무엇보다 두 번에 걸친 한미 FTA 협상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2006년 최초 협상 땐 서비스 시장과 경쟁·공기업 2개 분과의 협상대표를 맡았습니다. 당시 한미 FTA를 체결하면 우리 고3 수험생들이 수능 대신 SAT를 봐야 한다, 감기 진료비용이 10만원을 넘게 된다, 물값이 비싸져 콜라를 마셔야 한다 등 가짜 뉴스가 횡행해 대외협상 못지않게 대내 설득이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치열한 과정을 거쳐 타결한 한미 FTA가 한미 양국의 무역 투자를 확대하며 우리 제도를 선진화시키는 틀이 됐죠. 2018년 재협상 땐 수석대표가 되어 미국이 일방적으로 요구한 수십 가지 사항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서로 두세 가지씩 필요한 사항만 소규모 패키지로 협상을 마무리하는 성과를 거뒀죠.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인 RCEP를 7년 만에 타결시켰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두 나라 간에 협정도 굉장히 많은 찬반 논쟁 끝에 이뤄지는데, 15개 나라가 참여하는 ‘메가 FTA’라면 지극히 어려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죠. 이게 정말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었어요. RCEP가 타결됨으로써 인구 22억6000만명, 무역 규모 5조4000억 달러, 명목 GDP 26조3000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 경제블록이 출범했습니다.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이 한결 수월해질 거예요.”

-일하시는 동안 고충은 없었는지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통상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까닭에 성과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은 분야입니다. 밤새 일하고 돌아와도 해외 가서 놀다 온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죠. 국내 업무는 받쳐 주는 산하기관도 있고 시스템이 잘 돼 있어 공무원으로서 일하기가 비교적 수월합니다. 그러나 통상은 국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고 다른 나라 또한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변수로 판이 달라질 땐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요.

더구나 우리는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는 나라조차 없습니다. 아프리카 소속 회원국은 문화적·지정학적 공통점을, 캐나다와 호주는 농산물 강국이자 영국 연방에 속한다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서로의 이익을 대변해 주기도 해요.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 나라 중국, 일본과는 이해관계가 굉장히 달라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독자적 통상 역량을 키우려면 뭘 해야 할까요.
“다른 나라 대표들은 통상 업무를 수십 년 동안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협상장에 들어가서도 낯선 사람이 거의 없어요. 친밀한 인맥 또는 유대관계가 형성돼 있는 건 물론이죠. 그런데 우리는 생전 처음 만나 명함 돌리면서 교섭을 시작해요. 상황이 급변할 때 내부 정보 같은 것을 놓치기 쉽죠. 통상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인센티브를 줘서 그 중요성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공유해서 우수한 인재가 통상에 많이 들어오고 또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국내 인재의 국제기구 진출도 활발해질 수 있어요. 해당 업무 분야에서 쌓아온 전문성을 가장 중요하게 보거든요.

이런저런 업무를 조금씩 경험하는 순환보직제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WTO만 해도 전체 직원이 640명인데 그중 한국인은 4명뿐이죠. 164개 회원국 중 여덟 번째로 많은 분담금을 내고 있을 뿐 아니라 G7 회의에 연속 초청받는 국격임에도 말이에요. 어떤 분야를 완전히 장악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공이 딱 느껴지는 그런 인재를 양성해야 합니다.”

-통상의 미래에 대해 전망해주신다면.
“디지털, 바이오, 친환경 분야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국익을 끌어올릴 수 있어요. 과거의 세계 통상 질서는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던 반면, 오늘날의 통상은 나라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중요한 수단이 됐습니다. 기술과 산업, 안보, 사회 이슈까지 얽혀 국가전략의 핵심축으로 부상했죠. 단순히 주어진 규칙을 따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분쟁에 들어가겠다는 자세로는 국익을 극대화할 수 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 디지털 통상이 잘 되려면 전자상거래 원활화, 데이터 이전 자유화,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한 디지털 규범, 인공지능(AI), 핀테크 등 신기술 분야에 대한 규칙과 협력의 틀이 마련돼야 합니다. 싱가포르·뉴질랜드·칠레 3개국이 체결해 올초 발효된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이 그런 취지를 담고 있죠. 한국도 10월 초 가입 협상을 시작했고요. WTO 164개국이 다 같이 합의해 나가면 좋겠지만, 나라마다 관련 규정이 다르고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부터 출범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수험생이 잘 틀리는 문제를 AI로 분석해 맞춤형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토플 공부 앱을 국내 기업이 개발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디지털 협정이 안 돼 있다면, 해외 진출할 때마다 그 나라에 서버를 설치해야 할 수도 있고, 외국 수험생의 오답 데이터를 제공받는 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할 수도 있어요. 디지털 협정을 통해 비용은 줄이고 절차는 간소화할 수 있죠. 우리 규범이 해외에 통용됐을 때 더 유리한 것은 물론이고요.”

-현 상황에서 더 신경써야 할 나라는 어디입니까.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은 보복에 가까운 가혹한 배상을 패전국에 요구했습니다. 무역 장벽을 높이고 자국의 이익에만 골몰했죠. 그 결과 대공황이 왔고 파시즘이 등장했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등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를 교훈 삼아 모든 나라가 함께 잘해보자는 다자주의가 나타났어요. WTO를 비롯해 유엔,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을 만들어 큰 전쟁 없이 평화를 누려왔죠. 그런데 이젠 한계에 달한 것 같아요. 지금 태동하는 새로운 질서는 ‘다 같이’가 아니라 ‘우리끼리’ 하겠다는 겁니다. 한국은 언어적·문화적·지정학적 그룹 또는 블록이 없는 까닭에 물리적으로 고정된 특정 국가보단 공정한 자유무역·열린 시장 경제를 통해 성장한 나라들과 가치를 공유해 나가야 합니다. 이른바 ‘룰메이커(rule maker)’로 직접 새 국제 질서를 만드는 데 참여해야 하죠.”
 
나경태 기자



유 동문은

1967년 울산에서 태어나 1990년 모교 영문학 학사, 1995년 모교 행정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엔 밴더빌트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1991년 35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총무처에서 일하다 통상산업부로 옮겨, 외교통상부가 출범할 때도 줄곧 통상 업무를 맡았다. 2005년 자유무역협정 정책과장, 2007년 주중국대한민국대사관 참사관, 2014년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외신대변인, 2018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실장(1급)을 지냈다.
남편 정태옥(행대원94-99) 동문이 자유한국당 2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표를 냈으나 2019년 통상교섭본부장(차관급)으로 승진했다. 외국 통상 대사들로부터 ‘협상을 아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불렸으며, 전임 김현종 본부장은 ‘유명희는 대한민국 통상의 역사’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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