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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2017년 9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아레나의 서울대인

성기홍 연합뉴스 정치에디터·본지 논설위원

아레나의 서울대인



성기홍(사회86-90) 연합뉴스 정치에디터·본지 논설위원


“이 비참한 사람들은 불명예스럽지도 않고, 칭찬받지도 않는 미지근한 불쌍한 영혼들입니다.”(단테 신곡-지옥 제3편 34~36행)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하세계로 내려가던 단테는 지옥으로 건너가는 아케론강 근처에서 떠돌며 절규하는 이들을 발견한다. 지옥조차 입장을 거부해 영원히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죽지도 못하는 영혼들이다.

도대체 누구인가. ‘중간자’, ‘회색분자’, ‘비겁자’들이다. 좋은 일을 시도하지도 않고 나쁜 일을 도모하지도 않았던 이들이다. 이 편에도 저 편에도 속하길 꺼린 이들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임무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설령 안다 할지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이들”이라며 “단테는 비겁한 자들을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악의 인간으로 묘사한다”고 말했다. 왜 단테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악인’보다도, 미지근한 ‘비겁자들’을 가장 하류 인간으로 분류했을까.

세상에 해결해야 할 사건들은 도처에 있고, 새로운 도전들도 지천이다. 숲 속에 난 두 갈래 길에서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선택의 순간은 늘상이다. 북한이 수소탄을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겠다며 위협하고 나설 때 대응책으로 군사적 옵션을 택할 것이냐, 그래도 대화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냐. 저출산 고령화 시대 복지 부담이 늘어나는 지금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증세의 길로 갈 것이냐, 그래도 증세를 회피하는 우회로를 걸을 것이냐. 우는 아이 울음을 그치기 위해 호랑이가 잡아먹으러 온다고 을러댈 것이냐, 아니면 곶감 준다고 달랠 것이냐.

삶의 도정에서 선택은 숙명이다. 선택은 위험을 동반하지만, 그 두려움으로 선택조차 않으면 정체한다. 우물쭈물하다 ‘시한폭탄’만 후세로 떠넘긴다. 설사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온전히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로 지혜롭게 헤아리고, 사려 깊게 판단한 후 감연히 선택하고, 또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링에 오르지 않은 채 이러쿵저러쿵 지적질 해대는 사람이 아니라 피투성이조차 감내하는 ‘The man in the arena(경기장의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니다. 공(功)은 실제 ‘경기장에 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땀, 피로 얼룩져 있다. 그는 위대한 열정으로 대의를 위해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몸을 바치는 사람이다. 성공하면 승리의 성취감을 맛볼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위대하게 맞서는 용기를 드러내 보이고 실패할 것이다. 승리도 패배도 알지 못하는, 영혼이 없고 소심한 사람들과는 비견할 수 없는 존재이다.”(1910.4.23 소르본느대 연설)

불투명한 승패가 두려워, 책임을 피하려 경기장(arena) 밖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먼지와 땀, 때론 피가 튀는 것도 마다않은 채 경기장 무대 위로 성큼 오를 것인가.‘아레나의 서울대인’!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