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473호 2017년 8월] 기고 에세이

동숭로에서: 몰취미(沒趣味)

권영민 모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몰취미(沒趣味)



권영민(국문67-71) 모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무슨 일로 소일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오랫동안 강단에 있다가 학교를 떠났으니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해들 한다. 나는 그저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하면서 웃음으로 대답한다. 그런데 특별한 취미 생활이 있느냐고 다시 물어올 때는 좀 곤혹스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세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젊었을 때 바둑에 관심을 두었던 적이 있다. 대학원 시절의 일이다. 조남철의 기보(棋譜)를 여러 권 사다놓고 보면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기원에도 가끔 들어가 보기도 했다. 바둑의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점점 바둑놀음에 빠져들었다. 심심할 때는 친구들과 ‘점심 내기’ 바둑도 두었으며, 주말에 내 자취방에 놀러온 친구와 바둑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바둑이란 아무리 친한 친구와 두더라도 한 판 지고 나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러니 또다시 도전한다. 점점 악착스럽게 승부욕을 키울 수밖에 없다. 어떤 때는 내 속에 이렇게 끈질긴 승부 근성도 있었나 하고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이기기에만 집착했던 바둑을 나는 결혼 후 아내의 권유로 간단하게 끊었다.


내 친구는 주말마다 카메라를 들고 시골 벽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는 자신이 찍은 아름다운 사진들을 내게 자랑한다. 나도 그 친구를 따라 사진에 취미를 붙여보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친구가 권하는 대로 좋은 카메라도 구하고 삼각대도 사고 제법 근사한 가방도 구입했다. 카메라 다루는 법도 전문가로부터 제대로 배웠고 사진 기술에 관한 책도 보고 사진의 역사에 관한 서양 사람들의 책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사진기를 메고 그 친구를 따라다니다가는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기계를 다루는 내 솜씨가 늘 서툴렀기 때문이다. 내가 찍은 사진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경치가 훨씬 아름다웠다. 요즘은 친구가 가끔 멋진 사진을 메일로 보내오기도 한다. 어떤 때는 불타는 단풍이 어우러진 산자락이 내 컴퓨터 안에 담겨지기도 하고 눈 덮인 들판이 그대로 내 방안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이 친구가 보내주는 계절의 풍광에 나는 언제나 흥분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디지털 카메라로 도서관에서 찾아낸 자료를 사진 찍는 일에 겨우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돌이켜 보니 고향 친구의 소개로 일중(一中) 문하의 서실에 기웃거린 적도 있었다. 친구를 따라서 서예 전시회를 많이 찾아다녔고, 그가 권하는 대로 서체본도 사고 좋은 붓과 먹도 구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엄하신 조부님 슬하에서 배웠던 붓글씨를 취미삼아 더 연마해 볼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 여행 중에는 북경의 유리창(琉璃廠) 골목에서 중국 교수의 소개로 우연치 않게 유명한 서예가를 만났다. 그분이 자신의 서실로 나를 안내하여 좋은 붓 몇 자루와 화선지를 선사했다. 가끔 그 서예가의 호탕하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연적에 먹을 갈고 붓을 꺼내어 잡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별로 내 흥취를 자극하지는 못한다. 글씨 연습이 끝난 후 벼루를 닦고 붓을 빨아두는 일들이 번잡스러우니 차분하게 필력을 키우기란 벌써 글렀다.


요즘은 주변 친구들이 운동을 겸하여 골프를 권한다. 몇몇은 등산모임에 들어오라고 자주 연락을 하기도 한다. 나는 고맙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골프는 애당초 나의 관심사가 아니고 여럿이 날짜를 맞추어 행선지를 골라 요란스럽게 떠나는 산행은 부담스럽다. 사실 나는 거의 매일 저녁 무렵에 혼자서 아파트 단지 주변을 몇 바퀴 걷는 일로 모든 것을 대신한다.


낮에도 가끔 글을 쓰다가 막히면 컴퓨터를 닫고 책장을 덮어두고는 밖으로 나간다. 모자 눌러쓰고 운동화를 신고 한 시간 정도를 걷는다. 느티나무 사이로 들리는 새소리에도 화답하고 풀벌레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이쁘게 피어나는 풀꽃들과 인사한다. 등줄기에 땀 기운이 느껴질 정도가 되면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바람결이 고맙다. 어떤 때는 동네 찻집에서의 커피 한 잔도 기분 좋다. 집으로 돌아올 때 발걸음도 가볍다. 그런데 이렇게 말은 해도 딱히 내세울 것은 못된다. 이거야말로 몰취미니까.





*권 동문은 모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2012년 정년퇴임한 이후 왕성한 기고 활동을 비롯해 2년간 전국 각지를 돌며 강연 '문학 콘서트'를 열고 대중들과 문학을 주제로 토론했다. 이 내용을 묶어 지난 3월 저서 문학 콘서트'를 펴냈으며, 그 외에 '우리 문장 강의', '이상 문학의 비밀 13', '오감도의 탄생',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 등의 저서가 있다.

하버드대 객원교수, 버클리대 한국문학 초빙교수, 도쿄대 한국문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재 버클리대 한국문학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현대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서울문화예술평론상, 모교 학술연구상, 만해대상 학술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