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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호 2017년 8월] 뉴스 기획

“위안부 영상자료 찾으려 미국문서관리청 샅샅이 뒤졌다"

세계 최초 조선인 위안부 영상 발굴 정진성 교수팀 특별 인터뷰
광복절 기획

“위안부 영상자료 찾으려 미국문서관리청 샅샅이 뒤졌다"

세계 최초 조선인 위안부 영상 발굴 정진성 교수팀 특별 인터뷰


지난 7월 21일 모교 인권센터에서 정진성 교수팀을 만나 조선인 위안부 영상 발굴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들었다. 왼쪽부터 강성현 연구원, 정진성 교수, 박정애·이정은 연구원.



지난 7월 5일 서울대 정진성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조선인 위안부 영상을 공개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이 영상은 1944년 9월 7일 미·중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지역을 탈환한 직후 그곳에 갇혀있던 조선인 위안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46년 통합개교 이래 한국전쟁·민주항쟁·경제발전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변혁기마다 서울대인들이 이를 선도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통합개교 이전 식민지 시대의 과제인 위안부 진실규명에까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번 발굴은 의미가 깊다. 정 교수는 1992년 유엔에 한국인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유엔 결의안 채택을 이끌기도 했다. 7월 21일 모교 인권센터에서 정진성 교수와 팀원들을 만났다. 


정진성 "조사목적 아니지만 외교 도움 확실"
강성현 "발굴영상, 위안부 사건에 숨결부여"
이정은 "팀원들 전문성 탁월한 성과 밑거름"
박정애 "피해자의 고통 함께할 때 재발방지"


합리적 추정과 끈질긴 추적의 결실

“2015년 가을경 위안부 사진자료를 정리하면서 영상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사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는 ‘만삭의 위안부 사진’을 미 육군 사진부대 햇필드 이병이 찍었다는 사실과 햇필드 이병이 영상 전담 촬영자인 에드워드 페이 병장과 2인 1조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막연한 추측은 합리적 추정이 됐죠.”

정진성(사회72-76) 교수팀의 강성현(대학원00-02) 연구원은 미군이 심리전을 위해 사진 촬영을 전담하는 부대를 두어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 착안했다. 사진을 찍은 부대에 영상 담당자가 있었고, 이 부대의 부대원이 찍은 사진이 존재한다면, 영상 또한 존재할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강 연구원은 2016년 말까지 이와 관련된 연구를 정리해 같은 팀의 김한상(독문96-03) 연구원에게 전달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의 사진자료들은 촬영자와 장소, 날짜 등이 잘 정리돼 있었다. 그러나 영상은 그렇지 않았다. 필름에 어떤 내용이 찍혔는지 확인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할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이 중국,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촬영한 필름은 총 1만600여 편. 그 방대한 필름 더미를 촬영자, 촬영지, 촬영목적 등 교수팀이 보유한 입체적 단서들을 토대로 추려 나갔다.

“기록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영상에 민간인이, 그것도 여성이 등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반드시 특이사항으로 기록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미군은 동양의 민간인 여성이 조선인인지 중국인인지 영상만 보고 파악하기는 힘들 거예요. 중국에서 촬영됐으니까 중국인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죠.”

김한상 연구원의 이러한 추측이 적중했다. 1만600여 편의 영상이 200여 편으로 추려진 것이다. 김 연구원은 사람 얼굴 크기만 한 릴을 영사기에 걸고 하나하나 돌려 봤다. 부대명도 알 수 없는 군인들이 나왔다가 무기가 등장하거나 장소가 바뀌는 등 두서없이 촬영된 영상 속에서 중국군의 환한 표정과 대비되는 여성 포로들의 어두운 얼굴이 눈을 파고들었다. 조선인 위안부 영상이 세계 최초로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유튜브서 187만 뷰, 외교력 강화 기대

음성 없는 18초 분량의 흑백영상이 유튜브 조회 수 187만 건을 돌파했다. 정 교수팀에 대한 관심도 폭발적이었다. 국내 언론은 물론 AP통신, BBC, CCTV 등 전 세계 신문·방송사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새 정부 출범 후 2015년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재협상이 시사되고 있는 만큼 외교적 카드로서 결정적 역할을 하리란 기대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교수팀이 스스로 평가하는 영상의 가치는 달랐다. 

20년 전부터 위안부 관련 사회운동에 동참하거나 피해 할머니의 구술을 기록해온 박정애(숙명여대 한국사92-96) 연구원은 “문서나 증언, 사진으로 봤을 땐 할머니들이 처한 상황을 상상해보는 정도였지만 영상을 보고 나선 할머니들의 아픔까지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성현 연구원도 외교적 측면에서 더 큰 가치를 갖는다고 하기보단 기존 자료들의 내용을 다시 환기시키면서 대중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 연구원은 “사진과 문서가 위안부 문제의 뼈와 살을 복원했다면, 영상은 숨결을 불어넣어준 셈”이라고 덧붙였다.

정진성 교수는 “외교적 활용을 목적으로 한 조사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위안부 재협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발굴된 영상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일본에 내세울 명분이 더욱 분명해졌다는 것. “외교적 카드로만 사용되는 것도 문제지만 외교적 카드로도 제대로 활용을 못 하는 현실은 더 문제”라며 꼬집기도 했다.

정 교수팀은 현재까지 약 250건의 사진 및 문서와 1,000여 건의 자료들을 수집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일본군이 위안부 여성 30명을 총살했다는 기록이 적힌 중국 윈난 원정군의 작전일지를 공개했다. 생존 할머니들의 위안부 학살 ‘증언’과 일치하는 ‘증거’자료였다. 18초 영상에 등장하는 윈난성 쑹산 위안소 또한 학살이 자행된 곳이었다. 24명 중 1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이 미·중 연합군에 밀려 퇴각하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조선인 위안부들이다.  


중국 윈난 탈환 다음날인 1944년 9월 8일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굴 영상 일부(왼쪽). 쑹산 위안소를 탈출한 위안부들(오른쪽 위). 심문 받는 조선인 위안부들(오른쪽 아래).


영상 발굴은 더 큰 연구로 가는 과정

정 교수팀의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기록물 관리사업팀’이다. 정진성 교수가 모교 인권센터장 재임 시절 위안부 연구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모금한 돈과 후원금을 토대로 2014년 9월 결성됐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수면으로 떠오른 위안부 문제는 진상 규명 운동이 시작된 지 25년이 지나도록 정부의 기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서 하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의 학자들이 일본에 가서 연구할 만큼 위안부 관련 자료가 부족하다. 

정 교수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범했다. 지난 3년간 폭넓은 자료 수집과 생존자 증언 채록을 통해 일본군의 주둔 위치·퇴각 경로에 따른 조선인 위안부들의 학살 장소나 탈출 경로 등을 총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됐다. 정 교수는 “우리 팀이 위안부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를 외교적 카드로만 보면 안 돼요. 그 자체로 진실이 규명돼야 할 역사적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한 인식 하에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계속 발굴·축적해서 연구를 탄탄하게 만들어 가야 해요. 미국뿐 아니라 영국, 중국으로도 연구원을 보내 위안부 문제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한편 조선총독부 자료와 한일회담 자료도 탈탈 털어서 광복 이후 46년이 지나도록 공론화되지 못한 이유도 밝혀야 합니다.”

정진성 교수팀의 연구는 가해국인 일본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었다. 자국 여성의 인권이 무참히 유린당한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침묵을 강요했던 국내 상황에 대해서도 진실을 밝혀낼 계획이다. 정 교수팀은 정치적 장에서는 진실이 ‘굴절’될 수 있음은 물론 일본과의 외교에 있어 위안부 문제만 내세울 수 없는 현실도 잘 알았다. 외교적 관계는 그것대로 풀어가면서 역사적 진실은 진실 그대로 입증하는 투 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성현 연구원은 “진실 규명이 안 된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과 논의하는 것은 논의할 거리조차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문제”라며 진실 규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위안부 문제의 중요한 특징은 이 사건이 약 15년에 걸쳐 동아시아 전 지역에 걸쳐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건으로 공론화되지 못하다가 1991년 피해자가 공개 증언을 하면서 일본의 전쟁 범죄 및 과거사 청산의 문제로서 재인식됐다는 점이다. 

발전된 시대인식이 위안부 문제 호명

박정애 연구원은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그 사회의 민주화 정도·젠더 감수성의 민감도와 관련이 깊다”며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얘기할 수 있게 하고 그 얘기를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비극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전쟁 중이니까 그럴 수 있다’, ‘남성의 성적인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는 식의 주장은 시대를 역행하는 사고라며 “위안부 피해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조직적·체계적으로 자행된 것인 만큼 그릇된 정조 관념으로 할머니들의 입을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1992년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 한국인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유엔 결의안 채택을 이끌었다. 국제 사회에 지지를 호소하는 과정에서 식민 지배의 특수성보단 세계 대전의 보편성을 부각시켰다. 해외에선 ‘전시 하 여성인권 침해’로 인식되지만, 국내에선 ‘식민지 시대가 남긴 과제’이기도 하다.
“1965년 한일 협정이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결국 식민 지배의 산물입니다. 양자 모두 일본의 역사적·구체적 책임을 묻는 과정이 소거된 상태에서 맺어졌죠. 위안부 문제는 명확한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본으로 하여금 책임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는 한, 수요 집회가 계속되는 한 문제를 계속 보게 만들죠.” 강 연구원은 이와 같이 말하면서 광복 이후에도 반년 넘게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형편에 대해 덧붙였다. “18초 영상에 등장하는 생존자들은 1946년 4월까지 중국에 억류돼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할머니들을 도와 풀려났죠. 이는 위안부 문제가 연합국 대 일본의 전쟁에서 우리가 어느 진영에 속해서 그쪽이 이기면 해결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정 교수팀은 여성가족부의 연구비 지원이 중단돼 어려움을 겪었다. 학문적 연구가 정치적 상황에 의해 ‘외풍’을 맞은 것이다. 정부 용역 중심으로 이뤄지는 위안부 연구는 대개 1년 이하로 진행되기 때문에 프로젝트에 따라 연구자들이 이합집산하고 어느 한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들기 힘들다. 연구 주제 또한 정부가 필요로 하는 범위로 제한될 뿐 아니라 연구 담당자가 매번 바뀌어 그 결과물을 효율적으로 축적하기도 어렵다.

“팀원 중에서 제가 가장 오랫동안 위안부 연구를 해왔는데 우리 팀처럼 연구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기회를 주는 곳은 처음이었어요. 각자의 전문 분야를 존중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또한 커다란 연구계획 안에서 현 단계에 대한 파악과 다음 단계에 대한 예측이 가능했던 점도 힘들지만 즐겁게 연구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어요.”

성과 비결은 장기적 로드맵과 팀워크

박 연구원에 이어 이정은(대학원97-99) 연구원은 팀의 장점으로 활발한 팀워크와 연구에 대한 욕심을 꼽았다. “영상 발굴은 굉장히 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주어졌다고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집요하게 계속해서 자료들을 봐야 하는 고된 작업이죠. 팀원들이 정말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우리 팀만의 고유한 콘텐츠를 갖고 있어서 앞으로도 오래 함께할 것 같습니다.”
정 교수는 팀원 중 상당수가 처음부터 위안부 문제를 연구했던 학자는 아니라며 “근대 전쟁사, 사회구조사, 식민지 시대의 치안, 성매매, 인권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들이 합류하면서 위안부 문제의 큰 그림이 그려졌다”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정진성 교수의 공로를 이번 성과의 또 다른 비결로 꼽았다. “정 선생님은 즉각적인 성과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연구의 로드맵을 구상하시고 든든히 뒷받침해주셨죠. 위안부 연구 환경이 정치적으로도 그렇지만 내부적으로도 그리 좋지 않아요. 저희 팀의 성과를 놓고 박수 쳐주는 분도 있지만 흠집 내려는 분도 있습니다. 정 선생님이 그런 외적인 영향 때문에 흔들리지 않도록 ‘바람막이’ 역할을 잘해주셨어요.”

정진성 교수팀에는 김한상·전갑생(방송통신대 국문06-10) 공동연구원과 곽귀병(사회04-10)·공준환(사회06-12)·이민정(대학원16입) 연구보조원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