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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2016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손일근 가천대 석좌교수·서울대 발전위원회 고문

“일당백 인재 육성만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지요”
동문을 찾아서 - 손일근 가천대 석좌교수·서울대 발전위원회 고문

손일근(법학51-64) 가천대 석좌교수는 동창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동문이다. 3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법대동창회 및 총동창회 임원으로서 세계의 대학으로 도약하는 모교의 발전과 이를 뒷받침하는 동창회의 활성화를 위해 봉사해 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개학 120주년 기념 개교식에서 60번째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됐다. 권이혁 전 모교 총장은 에세이집 ‘평화와 전쟁’ 중 ‘존경하는 인물’에서 손 동문을 꼽기도 했다. 50년간 언론인의 길을 걸어온 손 동문은 동창신문 논설위원, 편집인으로도 오랫동안 봉사했다. 서울 공덕동 SNU 장학빌딩에서 손 동문을 만났다.

손일근 가천대 석좌교수·서울대 발전위원회 고문이 인터뷰 중 포즈를 취했다.



“일당백 인재 육성만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지요”


손일근(법학51-64) 가천대 석좌교수는 동창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동문이다. 3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법대동창회 및 총동창회 임원으로서 세계의 대학으로 도약하는 모교의 발전과 이를 뒷받침하는 동창회의 활성화를 위해 봉사해 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개학 120주년 기념 개교식에서 60번째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됐다. 권이혁 전 모교 총장은 에세이집 ‘평화와 전쟁’ 중 ‘존경하는 인물’에서 손 동문을 꼽기도 했다. 50년간 언론인의 길을 걸어온 손 동문은 동창신문 논설위원, 편집인으로도 오랫동안 봉사했다. 서울 공덕동 SNU 장학빌딩에서 손 동문을 만났다.

34년간 동창회 봉사…60번째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동창회와 인연이 오래 됐지요.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백상기념관장 시절인 1980년 법대동창회 부회장으로 인연을 맺었지요. 1992년 총동창회 편집위원(현 논설위원)으로 위촉돼 회보 편집에 도움을 주다가 2000년부터 상임부회장을 맡아 2014년까지 총동창회 일을 도왔습니다. 모두 34년에 걸친 긴 세월이었습니다.

능력도 주변도 별로 없는 저로서는 몸으로나마 열심히 뛰어 선·후배 동문님들의 친목을 도모하면서 모교를 지원해 일당백(一當百)의 엘리트 인재를 길러내고 그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동량으로 봉사하여 크게 보답케 하는 것이 선진국형 선순환의 원리이며 저로서는 이것만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상임부회장직에서 물러나셨지만 동창회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
“동창신문도 젊어지고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동창회는 동문간 화합과 우의를 도모하는 조직입니다. 그런 가운데 뜻을 모아서 모교를 지원하고 어려운 후배들이 낙오하지 않게 돕는 것이지요. 서울대총동창회는 서울대를 넘어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합니다.”

손 동문은 법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시절부터 주간신문 서울타임스 편집장을 맡는 등 줄곧 언론인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어떤 친구들은 내가 졸업년도가 늦으니까 고시를 준비한 게 아닌가 궁금해 했는데 고시에 응해본 적이 없다”며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한국일보에 입사했다가 한 친구의 설득으로 뒤늦게 졸업장을 받았다”고 했다.

-저서 ‘나는 고발자이고 싶었다’에 보니 4학년 때 한국일보에 기고한 칼럼 ‘정치투쟁의 윤리성’이 문화면 톱으로 실리면서 한국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나옵니다.
“신화와 같은 옛 추억입니다만은, 해방공간에 좌우가 격돌하는 것을 보면서 ‘정치인이 돼 젊은 열정을 나라를 위해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웃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신문을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면서 정독했고 웅변대회도 나가곤 했지요. 지금의 고3에 해당하는 구제 중학교 졸업시즌에는 동기생 간에 석별이 아쉬운 나머지 감상문 아니면 시 또는 자기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교환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때 졸업생도 아닌 저의 법제과목 담임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적힌 메모지를 저에게 건네주셨습니다. ‘내 과목 법제(法制)의 최고득점자를 지켜보고 기억할 것이오. 미래의 손 재판장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맨 위엔 안경을 쓴(당시 안경 안 썼음) 저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대를 지원했습니다. 제가 51학번입니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입니다. 당시 중고교 국어교사이시던 저의 선고(先考)께서 어렵게 마련해주신 등록금으로 등록을 마쳤지만 부산 피난길에 시체말로 알바를 해야 했습니다.

한때는 정당의 선거유세반원으로 뛰었으며 한때는 주간 신문의 편집장도 해봤습니다. 결국 모 일간 신문사의 기자로 정착하게 됐습니다. 신문사 일에 쫓기다보니 4학년 1학기 학점을 따고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 무기휴학에 들어갔습니다. 근 10년이 다 돼서야 뒤늦게 복학해 4학년 2학기 학점을 이수하고 졸업했습니다. 그땐 신문사 일이 사회를 위해 가장 보람있는 일인 것 같았습니다. 정당의 유세반 아르바이트에서 정치에 대한 실망도 큰 상처가 됐고요. 그래서 근 50년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정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중간에 1980년부터 법대 동창회에서 시작된 봉사활동은 34년간에 걸친 제 생애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기간이었고 저에게는 제 2의 인생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이 많으시죠.
“20대 때 황산덕 교수와의 세대론 논쟁, 한국일보 동경지사장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사건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별히 동경지사장으로 있으면서 장기영 사장에게 월남 특파원 파견을 건의해서 이뤄진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73년 정월 파리 평화협정에 따라 월남전쟁은 휴전이 성립됐지만 이런 때일수록 우리 한국일보만은 월남에 특파원을 보내 휴전 후의 현지 표정도 살피고… 뜻밖의 대어를 특종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요지의 메모를 항공편의 업무용 파우치에 넣어 장기영 사장에게 보냈습니다. 휴전한 마당에 보낼 이유가 있느냐, 근거가 뭐냐고 묻더군요. 한국 특파원이 한 명도 없고, 또 그냥 ‘영감’입니다 했지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 1975년 3월 안병찬 차장(현 동창신문 논설위원)을 사이공에 긴급 파견한다는 사고가 신문에 났어요. 안 특파원은 유일한 한국기자로서 월남전 30년 전쟁의 종막을 최후의 일각까지 빠짐없이 취재, 그야말로 특종을 캐내는 대수훈을 세웠습니다.”

-1970년 우리나라 최초의 NGO인 한국공해대책협의회와 노동문제연구소에서 활동을 하셨습니다. 당시 환경문제와 노동문제를 생각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국가발전의 지향점을 경각시킨다는 인식에서 두 단체의 발기이사로 참여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공해, 노동문제는 생소한 분야였지요. 한국일보가 요미우리와 제휴가 돼 있어서 일본의 자료를 많이 참고해 칼럼을 썼어요. ‘앞서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비용이 더 많이 든다, 개발도상국에서 먼저 대비해야 한다’는 그런 주장을 펼쳤습니다.”

남북통일은 세계평화의 첫 걸음입니다.
이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하룻밤 잠을 설치고,
울며 사색하지 않은 사람은 애국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손 동문은 1978년 한국일보 백상기념관장을 맡으면서 문화·예술계와 깊은 인연을 맺는다. 김기창·천경자·민경갑·이종상 화백, 김응현·김충현 서예가, 김수현·한운사 작가 등 많은 문화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2002년 문화계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현재는 고미술저널 회장도 맡고 있다.
-백상미술관장으로 계시면서 기억에 남는 전시라면.
“올해가 백남준 작가 서거 10주기입니다. 1982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을 뉴욕타임즈가 대서특필 합니다. 그 기사를 읽고 한국에서도 전시를 해야겠다 싶어 당시 한국일보 특파원에게 부탁을 해서 전시회 허락을 받았습니다. 작품은 백남준 씨 부인의 일본 친구가 운영하는 갤러리에 있으니 거기 있는 ‘피시 탱크’와 판화 등 작품들을 옮겨오면 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어요. 또 신문 경영주의 승낙도 여의치 않고 해서 결국 백남준 고국 첫 전시회를 놓친 게 지금도 무척 아쉽습니다.
기억에 남는 전시로는 유발서(劉勃舒) 전을 꼽습니다. 그때만 해도 중국 작가의 국내 전시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중국에서 가장 큰 미술기관인 중국화연구원장을 역임한 중국전통화의 대가죠. 평생 말만 그린 사람입니다. 문화혁명 때도 자원해 말 키우는 곳에 가서 고된 일을 하면서 말을 그렸어요.
그 외 민화전, 가훈전시회가 당시 문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가훈전시회에는 각 종친회의 국보급 소장품들이 대거 나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연장 전시도 부족해 지방 순회전까지 열었습니다.”

-즐기는 예술활동은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 서예를 좋아했어요. 2012년 대한민국 서예문인화원로총연합회 총재 조수호 회원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지요. 명예회원 자격으로요.”
손 동문은 가천대 석좌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그는 “서울대인이라면 선비정신에 입각해 수기치인(修己治人), 청빈검약(淸貧儉約), 선공후사(先公後私), 억강부약(抑强扶弱)해야 한다. 이것이 곧 ‘노블리제 오블리주’ 정신이다”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 원로로서 지혜를 들려주십시오.
“제가 그럴 말할 자격이 있나요? 주제 넘는 이야기 같습니다만, 신문사에서 연두사설을 쓸 때 그동안 스크랩한 다른 사설을 참고합니다. 읽어보면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해가 없습니다. 늘 난국이었죠. 우리나라가 지정학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만델라가 내한했을 때 모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지만 그때 그의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해보지 않는 한 모두 불가능하게 보인다.(It Always Seems Impossible Until It's Done)’ 우리가 노력하는 한 결국 모든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럴 때일수록 앞서 말한 대로 선비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신을 바로 세우고, 바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사로움은 뒤로 하며, 약자에게 유하고 강자에게 강한 서울대인이 돼야 합니다.”

그는 “남북통일에 대한 신념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남북통일은 세계평화의 첫 걸음입니다. 하룻밤 잠을 설치고, 고민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이 나라 운명, 애국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건강하시지요.
“한때 난청으로 좀 고생했으나 요새 많이 좋아졌어요. 젊었을 때 하도 사람의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많이 들어서 난청이 됐던 것 같아요. 호킹 박사 같은 사람은 지금 우리 주변에도 우주인이 섞여 살고 있다는데 말이지요.(웃음)”

-마지막으로 모교의 발전을 위해 조언 한 말씀 들려주시지요.
“성낙인 총장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이 나라의 엘리트는 국가와 미래를 짊어진 창의적 역량과 선의지가 충만한 선한 인재를 말할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을 끌어안고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맛이 나는 사람다운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말입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가까운 거리를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오래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시다. 힘을 모읍시다. 그리고 그 힘으로 모교를 도웁시다. 이것이 80 중반에 이르러 새삼 깨우친 저의 신념입니다.”


대학시절 한국일보 입사, 50년 언론인생 걸어

1932년생으로 법대를 졸업하고 주간 ‘의회보’, ‘서울타임스’ 등의 편집장을 거쳐 1955년 한국일보에 입사 비서실장, 조사부장, 도서관장, 기사심사부장, 방송뉴스부장, 논설위원, 동경지사장, 출판국장, 통일문제연구소장, 백상기념관장, 한국일보종합출판 대표이사, 한국일보 상임고문 등을 역임한 뒤 현재 가천대 석좌 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한편, 한국공해대책협의회, 노동문제연구소 등의 발기 이사로서 한국 최초의 NGO운동에도 참가 활동을 했으며, 중간에 약 2년간 삼익주택 전무와 삼주유업(도투락 우유, 아이스크림) 사장 및 회장 등으로 기업 경영에도 참여한 바 있다.

사회활동으로는 한국국제관계연구소 운영위원, 서울법대장학회 이사, 서울법대동창회 부회장, 서울대총동창회 상임부회장, 대한언론인회 자문위원회 위원장, 전국손씨화수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 이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칼럼 및 단평집인 ‘독백의 여운’, ‘나는 고발자이고 싶었다’ 등이 있으며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과 서울언론인 클럽에서 ‘원로언론인 특별상’을 받았다. 서울대 법대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표창되기도 했다. 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