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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호 2016년 3월] 기고 에세이

동숭로에서 : 내 음식 즐기는 사람들을 더 자주 대접해야지

최일옥(미학65-69) 소설가


내 음식 즐기는 사람들을 더 자주 대접해야지

최일옥(미학65-69) 소설가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 결심이나 각오를 한 가지씩은 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어떤 특별한 결심이라기보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내게 닥친 일,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을 기꺼이 내 몫으로 받아 안고 성실이 임하리라는 다짐을 다시 할 뿐이었다.


나이 탓인가. 근년 들어 부모상(父母喪)이 아닌 동년배 친구의 부음(訃音)이 적잖이 들려온다. 지난 연말에도 친구의 사망 소식이 전화벨을 울렸다. 당시 나는 해외 체류 중이어서 빈소로 달려갈 수 없었다. 서둘러 서울의 아들에게 대신 문상(問喪)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를 향한 애도의 마음은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니라 남편의 고교동창이다. 그러나 그와 신혼집이 같은 아파트 단지였고 그의 부인이 내 고교 후배여서 그들 부부와 곧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 후 아이를 낳으며 서너 번 집을 옮길 때마다 그는 늘 이웃한 단지에 살았다. 그는 남편보다는 나와 대화가 통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음식이 입에 맞는다며 이마에 땀방울을 매달 지경으로 열심히 먹어주었다. 게다가 그의 첫 아이가 내 아들과 동갑이어서 그 집 세 식구가 집에 놀러오면 아들의 친구 하나가 더 오는 셈이었다. 그는 외아들을 둔 탓인지 유난히 내 딸아이를 귀여워했다. 그는 첫 아이인 딸아이에게 ‘반 딸’이라 부르고 스스로를 ‘반 아빠’라 칭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그의 가족은 해마다 우리 집에 모여 제야의 종소리를 함께 들으며 새해를 맞았다. 당시 우리 집은 소위 말하는 양력설을 쇠는 터여서 만두도 빚고 산적도 굽고 양지머리 삶은 국물에 떡국을 끓였다. 이미 맛깔나게 익은 김장 김치와 깍두기에 산적, 잡채, 빈대떡, 갈비찜 등에 떡 만둣국이 놓인 새해 첫 아침 식사를 그들 가족과 함께 했다. 그는 유난히 우리 집 깍두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자정 전에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 해를 회고할 때도 그는 찬밥에 깍두기와 참기름을 듬뿍 넣어 밥을 비벼 숟가락 하나를 꽂아 넣고 우물우물 씹어대며 대화를 했다. 그는 깍두기에 비빈 찬밥을 먹을 때에도 얼굴이 흥건히 젖을 지경으로 땀을 흘렸다. 어느 핸가는 내가 담근 깍두기에 대한 그의 예찬에 흥분하여 김장을 할 때 그의 몫으로 깍두기 한 항아리 담가 준적도 있었다.


내가 뒤늦게 작가의 길을 잡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희곡작가였다. 그와의 대화는 늘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고 당시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맴돌았다. 취향이 엇비슷하여 읽은 소설이나 영화의 소감을 나누는 것도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는 한 해 두 개의 신문 신춘문예 희곡분야에 동시에 당선한 화려한 등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화려한 등단이 짐이었던지 아님 그를 주목하는 문단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던지 그 후에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과 소원해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가. 아마도 30년은 넘은 것 같다. 그가 글을 쓰지 못하고 부인이 일선에 나서 돈을 벌어야 하는 형편이 되고, 게다가 내가 위암 수술을 한 후 건강을 위해 서울을 떠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을 통해 그의 동향을 들을 수 있었으나 그 소식이라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거의 폐인이 된 것 같다는 말은 피를 나눈 오라비의 말년을 보는 듯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그의 부음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아들이 문상을 다녀오고 이제 발인이 끝났겠구나 싶은 날, 그의 아들에게서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아버지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곳에 잘 모셨다는 이야기 말미에 그 옛날 어린 시절 아주머니께서 해 주신 만둣국과 산적 깍두기 맛을 잊을 수가 없다며 아마도 자기가 태어나서 가장 맛있게 먹은 만둣국이었을 것이라는 말로 글을 마쳤다. 그 순간 나는 길을 떠난 그에게 한 번이라도 더 그 좋아하던 만둣국과 깍두기를 대접하지 못한 것이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댔다. 세모(歲暮)를 함께하던 친구의 부음을 세모에 들은 것만도 안타까운데 그 아들이 그 옛날 먹었던 음식 이야기를 하니 마치 그간 그와 멀리하고 지낸 것이 죄인인 양 느껴졌다. 하긴 나는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고 바쁘다. 그런 깜냥에 그를 조금이라도 돌본다는 것은 언감생심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의 말이 잊히지 않고 아프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옛 어른들 말씀이 ‘숟가락 끝에서 정이 난다’ 하시더니 그 아이도 저 먼 세월 속에 있었던 그 맛과 정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누군가의 부음을 들으면 그에 대한 갖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보아 사람이 가장 오래 기억하는 것이 맛에 대한 추억이라 믿는 나로서는 땀방울 맺힌 그의 강파른 얼굴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새해부터는 이것을 실천하리라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나를 찾는, 내 음식 맛을 즐기는 사람에게 보다 정성껏, 보다 많이, 보다 자주, 식사대접을 하리라 다짐했다. 그것은 길을 떠난 그에게 못해준 내 안타까운 마음의 만둣국과 깍두기 한 접시를 대신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제 내게도 새해 새 결심 한 가지가 생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