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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호 2016년 3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서울대 공대에 바람

이현구 모교 화학생물공학부 명예교수·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서울대 공대에 바람
이현구(화학공학58-62) 모교 화학생물공학부 명예교수·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우리나라는 국민총생산이 2014년 1조4,495억달러로 세계 13위 경제 강국이다. 무역규모는 2011년에 시작하여 4년 연속 1조달러를 넘어섰으며 지난해에는 수출 6위의 위상을 확보하였다. 2009년 OECD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한 이후 연간 190억 달러의 무상원조를 제공하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전환하였는데, 이는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2014년 기준으로 연구개발(R&D)에 723억달러를 투자한 바 이는 세계6위의 규모이며 GDP대비 4.3%로 단연 세계1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지표상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 선진국형 시스템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회 각 부문의 많은 일들이 민간 중심이 아니라 정부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정부의 정책입안이나 시행과정도 하향식 일변도이고 상향식으로는 진행되지 않는다. 정부 R&D예산의 운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연구자들이 자율적으로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지난해 6월 서울대 공대에서는 ‘백서’를 발간하여 자체적으로 취약점을 분석하고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한 개선안을 제시하였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자기반성이며 발전을 위한 몸부림이다. 지난해 교수 1인당 6억원에 가까운 연구비를 지원 받았지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연구비 지원이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절실한 취약점 중 하나로 지적되었다.


아울러 9월에는 26인의 서울대 공대 전문가 교수들이 한국산업기술의 위기를 경고하는 ‘축적의 시간’을 펴내어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와 함께 크나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새롭고 도전적인 개념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실패를 용인하며, 이러한 경험을 축적하고자 노력하는 조직과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사회적 인센티브 체제 전반을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각오를 새롭게 하여 특별한 인센티브를 정부에 요구할 자격과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백서’와 ‘축적의 시간’에서 제시된 사항들을 풀어 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장기적이며 안정적인 연구예산 지원이다.


정부는 우리 사회를 새롭게 도약시키기 위하여 “선(先)축적-후(後)발산”의 개념을 충분히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국가발전 즉, 발산을 위하여 과학기술의 우선적인 축적이 필요하며, 여기에 정부의 서울대 공대에 대한 안정적인 예산지원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미리 짜여진 틀 속에서 하향식으로 이루어지는 R&D예산 지원이 아니라 서울대 공대 교수진이 자율적으로 준비한 계획서를 제출하면 정부에서 검토, 심사하여 지원하는 상향식 연구지원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여 예컨대, 서울대 공대 교수 1인당 연 5,000만원의 연구예산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면, 아무도 하지 않는 연구, 미래지향적인 연구, 논문 발표가 어려운 과제의 연구, 연구자의 연구실적이 전무한 주제여서 연구비 지원이 어려운 과제의 연구 등이 꾸준하게 체계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공대 전체 교수 324명에 대하여 연간 162억원의 예산이 소요되지만, 정부 R&D예산 19조1,000억원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연구사업단의 예산규모나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의 지원규모가 연간 100억원을 상회하는 것과 비교할 때 전혀 과다하다고 할 수 없는 규모다.


물론 형평성 또는 균형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중국, 일본 등의 R&D예산 규모에 비추어 우리의 예산 규모로 보아 더 확대 지원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면 왜 서울대 공대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백서’나 ‘축적의 시간’을 발간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며 길을 찾고자 고뇌하고 있는 서울대 공대 교수들에 대한 인센티브라고 보아도 좋다. 물론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안정적 연구예산 지원에 대한 스스로의 당위성을 입증하여야 할 것이며,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현재 서울대 공대에서는 앞으로 10년에 걸쳐 매년 교수 3인을 선정하여 1인당 연 3,000만원씩 10년간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하여 그 1차 선정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지만 10년 후에 30명이란 규모는 너무 작아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기에 이 사업의 확대시행이 필요할 것이다.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상이 체계적으로 실현된다면 우리 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고, 또한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우리 사회에 등대가 되고 횃불을 밝혀 주는 역할을 수행하여 주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