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68호 2025년 7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교수회관 오솔길에서 되살아난 기억



권혁순 (화학교육85)
청주교육대학교 교수
월의 첫날, 처조카의 결혼식이 모교 교수회관 야외에서 열렸다. 나와 아내 모두 서울대 동문이지만, ‘개천의 용’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우리 집안에는 서울대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처조카가 서울대 출신의 훌륭한 분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우리 가족 모두가 모교 캠퍼스를 함께 찾는 특별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교수회관은 관악캠퍼스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모교에 종종 방문할 일이 있어도 교수회관까지 올라갈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이번 방문은 더욱 반가웠다. 오랜만에 찾은 교수회관 앞에서 나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설렘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감정을 느꼈다.
결혼식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교수회관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옛 기억들을 더듬을 수 있었다. 석사과정 시절, 은사님께서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대학원생들과 함께 교수회관까지 오르시며 점심을 사주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진 실험동물 사육실의 고약한 냄새는 더 이상 맡을 수 없었지만, 자연대를 지나 약대를 끼고 오르는 숲속 오솔길은 여전히 한적한 채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학창 시절의 기억을 조용히 되살려줬다.
은사님은 매주 논문 지도 모임을 진행하시며, 때때로 제자들과 함께 교수회관까지 걸어올라 점심을 대접하셨다. 당시 연구실은 외부 연구비를 따로 받아 운영하는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은사님은 사비를 들여 제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시며 연구 이야기뿐 아니라 삶의 방향,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까지 진심으로 들려주셨다. 학문적 태도는 물론,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까지 온몸으로 가르쳐 주셨던 분이었다.
당시에는 불모지였던 화학교육의 길에 처음 발을 들인 나로서는 그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은사님의 격려와 신뢰였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은사님은 내가 대학에 자리를 잡기 전 세상을 떠나셨고, 그 은혜를 직접 갚을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이 내게 남겨주신 따뜻한 마음과 배려는 지금도 내 삶 깊은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옛말처럼, 함께 교수회관 오솔길을 오르던 이들은 이제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지만, 그 길은 여전히 조용하고 평화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절에 나눈 따뜻한 가르침은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어느새 나도 그때 은사님의 나이가 되었다. 나도 논문 지도 모임을 가진 후에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삶과 연구에 대해 조언을 건네는 자리를 가지려 노력한다. 그때 받은 따뜻한 기억과 마음은 내가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또 그 제자들이 다음 세대에게 이어줄 것이다. 그렇게 모교의 정신과 따뜻함은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 숨 쉴 것이라 믿는다.
이번 교수회관 오솔길 방문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의 내 삶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했고, 그 뿌리가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내가 걸어온 길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은사님의 격려와 동료들의 응원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그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고, 내 제자들에게 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권혁순 동문은 모교 화학교육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화학교육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희중학교 과학 교사,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연구원을 거쳐 청주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 집필에 여러 차례 참여했으며, 최근 한국과학교육학회 부회장과 한국초등과학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