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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호 2024년 2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시대유감: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오흥권 분당 모교 병원 외과 교수


시대유감: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오흥권

의학95-02
분당 모교 병원 외과 교수


중학교에 다니는 딸은 걸그룹 에스파(Aespa)를 매우 좋아한다. 최근 이들이 리메이크 신곡으로 컴백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더니 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리메이크된 곡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이었다.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되었던 1995년은 나에게도 특별한 해로, 바로 대학에 입학한 시기였다. 검은 바탕의 DOS 시절을 지나 Windows 95라는 혁신적인 운영체제의 등장으로 컴퓨터 사용이 확 바뀌고 있던 때였다. 당구장을 전전하던 학생들은 점차 게임방으로 몰려가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다. 나의 세대는 아날로그 시대의 막바지와 디지털 시대의 서막을 함께 경험한 특별한 세대다.

아날로그 시대의 느슨한 연결이 여전히 나에게는 매력적이다. 녹두거리 입구의 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의 전면 게시판은 그런 매력의 일부였다. 그곳엔 형형색색의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고, 약속 장소는 그룹 이름을 적은 제목 아래 자그마한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사람들 사이로 바로 향하기 싫을 땐 서점 안에서 책을 구경했다. 서가 한 구석엔 레코드 가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음반들이 있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유통된 비합법 음반들이었는데, 대부분은 당국의 심의를 거치지 않은 카세트 테이프 형태였다.

공연윤리심의위원회(공륜)는 문화공보부 산하 기관으로, 음반과 영화, 비디오 등 문화예술 작품을 감독했다. 이 기구는 정권의 이념에 부합하는 대중 예술을 선호했고,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사전심의’였다. 작년에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 같은 영화는 이러한 심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태지와 아이들도 사전심의의 예외가 아니었다. 4집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시대유감’은 일부 가사가 과격하고 현실을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불가 판정을 받았다.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같은 부분이었다. 이에 서태지는 가사를 전부 삭제하고 연주곡 형태로 앨범에 실었다. 이는 사전심의에 대한 수동적 항의였다. 팬들과 시민들의 지지로 이 문제는 국회로 옮겨졌고, 결국 1996년 ‘음반과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사전심의 제도는 폐지되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사전심의와 관련하여 가수 정태춘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서정적 포크 음악을 하던 그는, 80년대를 거치며 제도권의 틀을 벗어나 자신의 음악을 전개했다. 1990년대 초, 그는 두 개의 앨범을 비합법적으로 발매했고, 검열 철폐를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 외로운 싸움은 결국 정부의 고발과 기소로 이어졌고, 이에 질세라 정태춘과 박은옥은 1994년에 헌법재판소에 위헌 심판 청구를 제기했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로 인해 사전심의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우리 대중음악은 이때부터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걷다 돌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다. 넘어진 아이들은 다쳐서 울고, 울음이 그치면 다시 길을 간다. 성숙한 어른이라면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돌을 치우고, 한 발 더 나아가 매끈한 길로 포장할 생각을 하고 실행한다. 리더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제도는 문제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의 노력이 길게 남는 결과물이다.




*오흥권 동문은 모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분당 모교 병원 대장암센터의 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2018년 한미수필문학상 대상을 수상했고, 영화로 보는 의학 이야기 ‘의과대학 인문학 수업’과 메디컬 에세이 ‘타임 아웃’을 출간했다.


재미있고 진솔한 메디컬 에세이로 서점가에서 인기를 끈 오흥권 교수의  '타임 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