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호 2024년 8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김보림 (역사교육93-98)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이 두 문장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까.
그는 ‘설국(雪國)’이라는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는 이 문장 덕분에 노벨문학상을 거머쥐게 되는데, 이렇게 세련된 문장이 1930년도에 만들어졌다니 새삼 놀랍다.
이 소설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고 하는 첫 문장을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희한하게도 그 다음 문장에 더 마음이 갔다. 일본어로 쓰여진 문장을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표현으로 바꾼 번역가는 아마도 천재였나보다.(나같으면 ‘저녁의 아래가 하얗게 되었다’라고 길이길이 웃음거리가 될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나는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 상황’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아마도 밤이 가고 새벽을 맞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고,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래로부터 흐르는 새로운 시작이 그것일까. 극한의 허무주의를 대표하는 그의 소설이 이처럼 무한의 선명해지는 시작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이긴 하다.
서설이 길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어두운 ‘긴 터널’이 있고, 그 끝의 새로운 것을 기대하며 터널을 지난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 그 새벽의 운무에서 희망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운명과 의지에 나를 맡기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내게 비유하자면, 고등학교 3년간의 기간은 ‘긴 터널’이었고, 대학의 시작은 ‘눈의 고장’을 만난 것과 다름없었다. 특히나 대학 1학년생으로서 ‘밤의 밑바닥이 하얘지는’ 그 기분은 정말 좋았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그런데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93년은 우리나라를 포함, 전세계적으로도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였다. 우선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된 것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삼 문민정부가 시작되었다. 그 해 8월에는 태풍 로빈이 큰 피해를 주었고, 10월에는 최근 영화로도 유명해진 소말리아 모가디슈 전투가 있었다. 또한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문화적으로는 그룹 듀스가 데뷔하여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X세대를 상징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최초로 실시되었다.
지금와서 이렇게 1993년의 한 해를 정리해보니, 신입생 시절의 나는 나도 모르게 시대라는 ‘긴 터널’의 한 지점을 지나고 있었나보다. 다만, 젊은 시절에는 ‘터널-종착지-희망’이라는 단계들로만 파악된 인생의 의미가, 이젠 더욱 풍부해진 경험을 통해 이 단계들은 반복되며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이 ‘생각하기’에 따라 터널이자 종착지이자 희망을 품을 시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다.
그래서 나는 ‘밤의 밑바닥이 하얘지는’ 심정-매 순간 선명해지는 시작과 희망을 품을 수 있는-을 느끼기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기분을 느끼고자 소설의 배경인 에치고유자와(越後湯沢) 온천지역을 훌쩍 다녀온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인 것으로….
*김 동문은 모교 역사교육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역사교육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츠쿠바대 교환학생, 한국교육개발원 전문연구원, 미국 컬럼비아대 객원교수를 거쳐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국민과의 창설과 국사 교육:일제강점 말기 조선인의 역사교육’, ‘하늘나라에서 온 언니의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