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호 2024년 12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교수님의 비밀 과제
이동희 (조소11-16) 작가
교수님의 비밀 과제

이동희 (조소11-16)
작가
지금으로부터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미술대학의 전공 수업은 보통 ‘크리틱’ 위주로 진행된다. 크리틱이란 쉽게 말해 과제나 작품을 보면서 비평, 질의응답, 토론 등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중증 청각장애를 가진 나는 이 시간이 제일 싫었다.
상대방의 말을 일대일로 알아듣는 것도 힘든데, 다대다로 치열한 담론을 주고받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크리틱 시간만 되면 나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나라고 가만히 있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른 학우의 작품을 보면서 느낀 호기심과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두려웠다. 내가 용기 내어 건넨 질문이 사실은 이미 누가 말했던 내용이라면? 수치심은 물론이고, ‘얘는 전혀 수업을 듣고 있지 않구나’라고 누명까지 쓸 수도 있었다. 나의 장애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토론을 듣지 못해서 저렇게 질문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를 측은하게 여길까봐 두려웠다.
그런 나를 대하는 교수님들의 반응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무심하게 방치하는 교수님도 있는가 하면, 부담스럽게 계속 지목하며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고 재촉하는 교수님도 계셨다. 이 글은 그 많은 교수님 가운데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어느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다.
늘 조용히 수업 시간을 흘려보내던 나를 유심히 지켜본 교수님은 어느 날, 나에게 수업이 끝나면 잠깐 남아있으라고 하셨다. 무슨 일로 남으라고 하신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다 수업이 끝났다.
아니나 다를까, 교수님은 왜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지 물어보셨다. 전혀 채근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걱정스럽고 따뜻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왜 수업에 참여할 수 없었는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장애와 자존심 사이에서 홀로 갈팡질팡 괴로워했던 감정들을, 교수님은 끝까지 경청하셨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터놓고 말해본 적이 없어서 때로는 신나게, 때로는 열변을 토하듯 한참을 떠들었던 것 같다. 다 듣고 난 뒤 교수님은 조심스럽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그러면 글로 써보는 것은 어떻겠니?”
교수님은 수업 내내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허락해주시되, 학우들의 작품을 보고 든 생각이나 감상을 글로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개인 과제를 내주셨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수업이 끝날 때마다 A4 용지 2~3장씩 학우들의 작품을 보고 느낀 의문이나 감상을 정성껏 써서 교수님께 제출했다.
교수님께서도 내 글을 허투루 넘기지 않으셨다. 종이 뒤편에 늘 코멘트를 남겨주셨다. 작품을 만든 학생이 실제로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도 알려주셨다. 심지어 맞춤법과 띄어쓰기까지 꼼꼼하게 체크해주셨다.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은 잊지 않고 꼭 적어주셨다. 그렇게 교수님과 나의 ‘비밀 과제’는 한 학기동안 은밀하게 계속되었다. 나는 더 이상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다. 작업을 할 여유와 공간이 충분하지 않거니와, 사실은 그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개인 출판사를 설립했다. 책 두 권을 출간했고, 한 권을 더 출간할 예정이다. 여러 기업체에서 정기 칼럼을 연재하고, 강의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에게 글쓰기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가르치고 있다.
평생 화가, 조각가라는 꿈을 바라보며 걸어왔던 내가 지금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거라고, 어릴 적 나는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기나 할까. 그 스승께서는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어느 학생의 삶이 크게 변화하리라고 예상하셨을까.
개인 SNS에 신간 출간 소식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사설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맞팔’사이인 교수님께서 조용히 ‘하트’를 눌러주시는 것을 보면,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응원하고 계시는 것 같아 감사하고 벅차다. 십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의 ‘비밀 과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동문은 모교 조소과 졸업 후 1인 출판사 ‘동치미’ 대표이자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2020년 출간한 첫 에세이 ‘안 들리지만, 그래도’는 청각장애인 청년으로 살며 겪은 학창 생활과 아르바이트 경험을 유쾌하게 풀어내 호평을 받았다. 최근 두 번째 에세이 ‘나란히 걷는다는 것’을 펴냈다.

이동희 동문의 두 번째 에세이 '나란히 걷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