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호 2024년 7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개와 늑대의 시간
권용진 (정치외교17-21) 작가 겸 로스쿨생
개와 늑대의 시간
권용진 (정치외교17-21)
작가 겸 로스쿨생
2021년 2월, 교정에는 사람이 없어 거센 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L’heure entre chien et loup”, 우리말로 번역하면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때, 즉, 황혼을 뜻한다. 대학교 4학년 졸업반 시절은 나의 삶과 사회 전체에 ‘개와 늑대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이었다.
2019년 겨울까지는 집단에 소속되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 너무도 당연했다. 학부 선배, 동기들이 하는 동아리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들었다. 학생자치 일에도 열심이었다. 학부 내에서 감투를 쓰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곤 했다.
그때까지는 4년 만에 바로 졸업할 줄도, 정치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공부하게 될 줄도 몰랐다. 2020년 한 해를 휴학하고 중동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일주하고 싶었다. 들을 수 있는 수업은 다 듣고 6학년을 꽉 채워 졸업하고 싶었다. 정치사상과 유럽정치를 연구하고 싶었다. 취미로 즐기던 영화도 직접 찍어보고 싶었다. 병역도 느긋하게 해치우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2020년 초, 팬데믹이 터졌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익숙했던 세계와 멀어졌다. 예전처럼 학부 사람들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해외로 나돌겠다던 계획도 무산됐다. 할 일이 사라졌으니 하던 대로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다른 일이 없으니 학점을 꽉꽉 채워 들어도 버틸 만했다.
어쩌다 보니 소위 ‘칼졸업’을 할 조건이 되었다. 별다른 계획 없이 일단 졸업하기로 했다. 2021년 2월, 교정에는 사람이 없어 거센 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든 채 조촐하게 사진을 남겼다. 학생이라는 명목으로 병역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역시 별생각 없이 훈련소에 들어갔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팬데믹이 나에게 남긴 것은 단절이자 전환이었다. 익숙한 외부 세계와 멀어지면서, 내면의 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일 수 있었다. 시간과 체력을 쓸 곳이 줄어들자, 다양한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생활이 단조로워지다 보니, 부유하던 장래 고민을 마치고 전문 분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에너지를 쌓고 집중시킨 결과는 나름 만족스럽다. 교환학생 경험과 학부 시절 공부 내용을 엮어 책을 출판했다. 전역 직후 라틴아메리카를 홀로 40일간 여행했다. 로스쿨에 입학해 세 학기를 법 공부에 전념했다.
2020년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개였는지, 늑대였는지. 그해를 기점으로 삶의 방향타가 크게 돌아갔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그때의 전환이 상승으로 이어질지 하강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그때를 생각하며 안도할지,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어쨌든 그 시간을 안고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 사회도, 한국 사회도 많이 변했다고들 한다. 포퓰리즘이 득세했다든지, 집단주의가 쇠퇴하고 개인주의가 강해졌다든지, MZ세대가 떠올랐다든지, 낭만이 사라지고 허영심과 화가 많아졌다든지 등, 무겁게 집어 들거나 가볍게 던진 숱한 논평이 부대낀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팬데믹이 사회에 큰 자국을 남긴 것만은 확실하다.
그 자국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개가 남긴 침 자국일까, 사나운 늑대가 남긴 이빨 자국일까. 당장 답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답은 언젠가 우리 앞에 도래한다. 부단히 노력한 자만이 당당하게 답을 마주할 수 있다. 팬데믹이 어떤 영향을 주었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주저앉아만 있으면 개를 잃어버리든 늑대에게 잡아먹히든, 둘 중 하나다.
*모교 정치외교학부를 졸업한 권 동문은 역사, 정치사상, 철학에 관심을 두고 사람 사는 모습과 세상을 관찰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려 한다. 훔볼트대 교환학생으로 베를린에 머물며 중동부 유럽 5개국을 여행했고, 최근 그 여행기를 담은 저서 ‘유럽이 건넨 말들’을 출판했다. 현재 서울 소재 로스쿨에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