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호 2025년 7월] 오피니언 논단
세계질서 선도하고 규칙 설계하는 나라로

손인주 (동양사91)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집권 2기 국정과제 실현의 핵심 내용을 담은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이 7월 3일(현지시간) 미 하원에서 다시 통과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1기 행정부가 보인 것 이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과 기존 국제질서에 상당한 변화와 격동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최근에는 시진핑 중국 주석의 실각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중국 내부뿐 아니라 국제질서 전반에 불확실성을 부추기는 각종 루머와 억측이 난무하는 형국이다. 혼란과 대격변의 시기, 대한민국은 어떤 전략과 원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급변하는 인도-태평양 질서 속에서 수동적 대응자가 아닌, 능동적 선도국가로 외교·안보·통상 전략을 재정비해야 한다. 새 정부는 눈앞의 정치적 유불리보다 역사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초당적 외교를 추진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국민과 국익을 최대한 지키는 외교·안보·통상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미 동맹은 외교의 최우선 축이다. 미국은 안보·경제·기술 측면에서 한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파트너이며,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 따라서 한국은 한미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되, 단순한 안보 동맹을 넘어 기술, 산업, 에너지 분야까지 확장해야 한다. 또한 미국과의 협력이 국익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하기 때문에, 한·미·EU, 한·미·일, 한·미·인도 등 다양한 소다자 외교 채널을 병행 활용함으로써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다자 외교 역량 강화는 필수다. 여야가 공동 추천한 외교·안보·통상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블루리본 위원회’를 구성해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APEC 정상회의와 같은 국제무대에서 트럼프 대통령 및 주요 글로벌 리더들과의 접점을 적극 활용하고, 방산 협력, 국방조달, 에너지 협력을 통해 동맹을 미래형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경제안보 측면에서 한국은 수동적 대응을 넘어 전략적 파트너로 도약해야 한다. AI와 반도체 분야에서의 ‘CHIP-4 동맹’(한·미·일·대만) 강화, 다자 인공지능 연구소(MAIRI) 설립, 에너지 자원 협력 등은 트럼프 2기의 보호무역주의에 맞선 능동적 해법이다. 미국 내 연구 인프라 확충과 현지 인재 유치, 국내외 생산 거점 연계 등을 통해 글로벌 기술 동맹을 구체화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은 새로운 혁신 순환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동남아, 동유럽, 동아프리카, 남미 등지에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이를 국내 제조와 연결하는 글로벌 산업 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공급망 다변화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정부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해당 국가들과 포괄적 동반자 협정을 추진하고,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등 글로벌 프로젝트에도 범정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와 군사적 도발은 대한민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안보 리스크다. 현재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주장하며 협상 여지를 좁히고 있고, 북·러 밀착과 미·중 경쟁 속에 북핵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따라서 ‘단기적 비핵화, 중기적 경제통합, 장기적 통일’이라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압박과 대화를 병행하되, 지금은 협상보다는 안보 안정과 도발 억제가 우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재정비되는 시기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중 관계는 지혜로운 외교가 필요하다. 안보와 경제에서 중국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지만, 가치와 제도 면에서 간극이 커지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의 격화 속에서 미국의 동맹인 한국이 지닌 전략적 공간의 제약을 냉철하게 인지해야 한다. 한미일 삼각 공조 속에서 한중 관계를 조율하면서, 일본과 함께 미중 간 극단적 충돌을 방지하는 조정력이 요구된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 내부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하고 있으며, 중국인민해방군의 군사 작전 능력을 높이기 위해 군 개혁도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발과 숙청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정치적 노이즈를 과도하게 해석하여 시 주석의 실각이나 중국 체제 위기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대를 반드시 만들겠다는 중국 통치자들의 오랜 염원과 강한 의지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중국발 도전과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은 양자 및 소다자 외교 플랫폼을 슬기롭게 활용해야 한다. 한중 정상회담 추진, 한·중·일 협력 틀 활용 등을 통해 관계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아세안·인도 등 제3국과 협력을 통해 대중국 협상 레버리지를 확보하는 전략도 병행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질서를 선도하고 규칙을 설계하는 외교 전략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주어진 조건을 관리하는 시대는 지났다. 미래를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국가로서의 책무와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