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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호 2023년 8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몇 공단인가?

김훈동 농학63-69 전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회장 수필가·시인
몇 공단인가?


김훈동
농학63-69
전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회장
수필가·시인


대학에 들어와 선배들을 만나면 너나없이 “몇 공단인가?” 물었다. 처음 듣는 말이라 웬 공단인가 해서 어리둥절하며 멈칫했다. “몇 학번이야?” “아아, 네 63이야요”, “63이 뭐야?” “63109입니다.” 그래도 선배는 이해가 안 되는지 재차 물었다. “몇 공단인지 모르는구나” “63학번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고 선배는 내 말을 알지 못해 ‘이상한 놈’으로 치부한 듯 어정쩡한 표정이었다. 

그 후에 선배의 물음을 알게 됐다. 선배들은 내가 입학하기 직전에는 단기 학번을 썼다. 그래서 끝자리는 0을 붙여 3공단, 5공단이라고 했다. 우리 세대부터 서기 학번을 쓰기 시작해서 서로가 동문서답하듯 한 거였다. 63학번이 서기학번의 시조다. 불통과 소통이 얼마나 사람 사이에 중요한지 알게 된 계기였다. 기반정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대응력에 차이가 있다.   
 
무엇이든지 첫 느낌이 중요하다. 사람 만나는 것도 그렇고 물건 고르는 것도 그렇다. 서둔벌에 자리한 농대 캠퍼스는 울창한 숲속이었다. 입학하여 처음 만난 대학교수는 당시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겸임하던 유달영 교수였다. 사회적 활동 폭도 넓고 많은 저서를 낸 문필가로서도 유명했다.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이름 없는 들풀로 사라져 버림도, 영원히 빛나는 삶의 광영도 젊은 시간의 쓰임새에 달렸거니 오늘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젊은 하루를 뉘우침 없이 살게나” 성천 유달영 교수의 글이다. 얼마나 멋진 글인가. 내가 대학생이 되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할 때 이 글이 나를 인도하는 듯 확 끌림이 왔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그 당시 유달영 교수는 화훼학을 가르쳤다. 꽃, 조경 등을 인문학적으로 강의하여 수강생들이 몰렸다. 나는 전공과목이었지만 다른 과 학생들은 선택과목으로 수강했다. 학기말 시험 때 일이다.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다. 유 교수는 다음 날 흑판에 시험문제를 적었다. ‘꽃 이름을 열거하라.’ 심오한 화훼학 이론 중심으로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한 것에 비하면 의외의 문제였다. 시험문제를 보자마자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시험은 끝났다. 서로 “너, 꽃 이름 몇 개 썼냐?” 묻기 바빴다. 많이 쓴 친구들은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원 재시험’이었다. 유 교수는 “대학생들이 초등학생처럼 꽃 이름만 열거했다.”면서 “식물분류학상으로 구분하여 그 특성을 열거하고 거기에 속하는 꽃 이름을 적어야 대학생다운 답안이다”라고 따끔한 질책을 했다. 올바른 학문의 길을 일깨워 준 일화다.         

당시 우리나라는 유일한 산업이 농업뿐이었다. 국민 80%가 농업에 매달렸다. 식량부족국가로 해외원조를 받던 시절이었다. 보릿고개란 말이 있었을 만큼 만성적인 쌀 부족에 시달렸다. 주먹만한 쌀을 육종하여 배고픈 설움을 이겨내고 싶었다. 통일벼를 육종한 허문회 교수실에 둥지를 틀고 4년간 한눈팔지 않고 나름 열심히 전공에 충실했다. 하지만 졸업할 무렵 허 교수께서 “김군, 자네는 학계로 나가지 말고 농협에 들어가 농협을 개혁하는 데 앞장서게나.” 존경하던 은사의 말씀이니 엇박자를 낼 수도 없었다. 곁에서 나를 지켜본 은사의 충언에 따라 농협채용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유달영 교수의 글귀대로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젊은 하루를 뉘우침 없이 살았나’를 늘 생각하며 30여 년 부지런히 달려 농협 생활을 마감했다. 허 교수님의 가르침대로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하고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듯 세월만 축냈는지 모른다. 내겐 대학은 평생 울림을 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배움터이자 삶의 진로를 뚫어가는 방향타였다.  


*김 동문은 재학 중 ‘시문학’으로 등단했고, ‘수필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수필문학추천작가회장, 수원문인협회장, 수원예총 회장을 역임하고 수원문화재단 이사로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수필집 ‘그냥, 지금이 참 좋다’, ‘넌, 그 많은 책 다 읽냐?’ 시집 ‘나는 숲이 된다’, ‘틈이 날 살렸다’를 냈다. 농협대 교수, 농민신문 편집국장, 경기농협 본부장, 경기도적십자사 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