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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2023년 9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2800억 원어치 와인 폐기한 이유

홍지영 불문89-93 SBS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느티나무칼럼
 
2800억 원어치 와인 폐기한 이유



홍지영
불문89-93
SBS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와인 종주국 프랑스 과감한 결단
가격 유지해 살아남기 위한 조치


와인 종주국 프랑스가 최근 와인을 대량 폐기했다. 올림픽 규격 수영장 100개 분량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비용도 2억1600만 달러(약 2800억원)나 들었다. 이에 앞서 지난 4월에는 프랑스 와인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보르도 포도밭을 갈아엎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는 5700만 유로(약 74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와인의 종주국인 프랑스, 그것도 최대 산지인 보르도에서 이런 조치들을 취할 만큼 프랑스에서 와인이 남아돌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몇 년 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식당과 술집이 영업을 못하게 된 이유가 가장 크고, 건강을 위해 알코올 섭취를 줄이는 분위기 속에서 와인도 예외가 아니게 된 탓도 있다.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가족들이 식탁에서 와인병을 따는 모습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됐을 만큼 와인 소비는 전 세계적으로 줄었다. 반면 와인 생산에 드는 비용은 치솟고 있다. 인건비가 높아진 것은 물론, 지구 온난화로 인해 유럽은 더 뜨거워졌고, 가뭄이 심해지면서 관개가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산불까지 자주 발생해 포도밭 관리에 드는 비용은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이다. 남아도는 포도주를 대량 폐기하고, 포도밭을 갈아엎는 극단의 조치들은 결국 ‘가격을 유지해 살아남기’ 위한 조치들인 셈이다.

보르도 포도밭처럼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예는 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내게도 그런 상황이 왔다. 좀 넓은 집으로 이사온 지 4년. 그런데 집이 갈수록 좁아지는 느낌이다. ‘더 넓은 곳으로 옮겨야 하나? 수납장을 어디에 어떻게 더 짜서 넣어야 하나?’ 하고 한참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짐을 버리는 것’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베스트셀러가 됐던 일본 작가 곤도 마리에는 ‘정리의 시작은 버리기’라고 했다. 좁은 집에서 사는 일상이 보편적인 일본에서, ‘수납의 달인’이라는 그녀도 수납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수납장에 쑤셔 넣어두기보다 버리라는 거다. 나아가 정리는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해야 한다고도 했다.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다시 여기 있던 게 저기 가 있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한꺼번에 싹 정리하라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버리기 전에 발칵 뒤집어서 꺼내 놓고 버릴 것과 쓸 것을 한꺼번에 챙겨야 한다. 나중에 울면서 다시 찾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개인도, 국가도 ‘버리는 지혜’가 중요하다. 그것도 ‘잘’ 버리는 지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