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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호 2023년 3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전쟁 중에 만든 노동법, 70년 동안 그대로인 까닭


관악논단

전쟁 중에 만든 노동법, 70년 동안 그대로인 까닭



김태기
경제76-80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법 제정·개정 때 정치 환경 영향 커
경제 환경 따라야 고용·소득 늘어


거래관계와 고용관계의 발전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도 늘어난다. 하지만 이를 규율하는 노동법이 얼마나 효과적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이 지속 성장하고 실업률이 낮고, 유럽이 선진국이라도 북부는 양호하나 이탈리아 등 남부는 경제위기와 고실업에 시달린다. 저성장의 덫에 빠진 남미 국가는 실제로 노동법의 적용을 받는 공식 부문과 그렇지 못한 비공식 부문으로 나뉘고, 비공식 부문의 고용 비중이 50%가 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효과적인 노동법은 기술과 인구는 물론 산업구조 등의 변화 등을 반영해 노사 당사자가 거래관계와 고용관계를 능동적으로 발전시키게 한다.

우리나라의 노동법은 낙후해 있다. 채용부터 퇴직까지 임금·근로조건의 결정과 조정에 정부가 세부 기준을 정한다. 그 기준이 획일적이면서도 복잡하고 엄격해, 노동법은 규제와 처벌에 방점을 둔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자리의 양과 질의 개선은 따라가지 못했고 오히려 후퇴해왔다. 역대 정부 대부분이 노동법을 환경 변화에 맞게 현대화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노동법 개정이 정치·이념 논쟁으로 비화하고 노동계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노동법 현대화가 지체·실패하면서 노동시장은 기득권을 가진 근로자와 그렇지 못한 근로자로 단절되었고, 저임금 근로자의 비중이 커졌다.

어떤 나라든 노동법은 정치와 직결되나 우리나라는 심하다. 노동법의 제정부터 개정까지 경제나 기술보다 정치 환경이 오랫동안 큰 영향을 끼쳐왔다. 보통 노동법보다 법의 핵심인 민법은 물론 형법과 상법이, 또 노동법도 근로기준법이 노동조합법보다 먼저 제정되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이 6·25전쟁 와중인 1953년 3월 8일, 근로기준법이 그해 5월 10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 제정되었다. 반면, 형법은 6·25전쟁 휴전일(1953년 7월 27일) 이후인 1953년 9월 18일, 그리고 민법은 1958년 2월 22일 또 상법은 1962년 1월 20일에 제정되었다.

우리나라의 노동법 제정은 공산화의 위협에 영향을 받았다. 노동기본권을 헌법으로 보장한 것도 무관하지 않다. 공산당 계열 노조의 파업은 안 그래도 피폐한 경제는 물론 생소한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렸다. 이 때문에 노동법 제정은 그만큼 시급했고, 노동조합의 활동과 노동쟁의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정부의 무분별한 개입은 피해야 하기에 勞·使·公 3자 구성의 독립적인 행정기관인 노동위원회가 그 역할을 하였다. 임금·근로시간·휴가 등에 관한 법정 근로 기준도 농업 중심 경제 등 현실보다 훨씬 높게 잡을 수밖에 없어 근로기준법의 실효성은 처음부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 환경과 괴리된 노동법은 성장의 정체와 실업 및 빈곤의 악화로 이어졌다. 농업에서 제조업으로의 산업구조 전환, 농촌에서 도시로의 노동력 이동, 빈곤과 불평등 해소에 대해 별다른 고려가 없었다. 이러한 한계는 1960년대 들어와 성장을 나라의 최고 과제로 삼고, 자본 투입으로 어느 정도 극복했으나, 노동법 현대화에 이르지 못했다. 반면, 기업이 노동법을 무시하고 정부가 이를 방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근로자들의 불만은 커져왔다. 하지만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억눌려왔다가 1987년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노동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런 정치 환경의 변화는 노동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민주화 이후 노동법은 노동기본권 확대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기존의 노동법 체계를 유지했다. 노조의 활동과 노동쟁의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줄었으나, 근로시간 등에 대한 규제는 강화해 노사 자치와 자율보다 정부의 관여는 확대했다. 이 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로 다소 완화됐지만 큰 변화가 없었다. 민주화가 디지털화 및 세계화와 맞물린 시기이기 때문에 노동법이 이를 반영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 노동시장은 경직화되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또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노동력 이동은 단절되었다. 노사관계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넘어 근로자끼리와 노조끼리 즉 노동 내부로 확대했다.

세계 각국은 제조업 시대의 노동법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개정해왔다. 정부는 물론 기업과 노조 모두 자율과 분권을 중시함에 따라 개별 기업과 근로자의 자유로운 거래관계와 고용관계를 뒷받침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획일적 규제는 근로자에게 돌아갈 일자리와 소득의 손실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생산요소에서 인적자본으로 가치를 높이기 어렵게 만들고, 신기술의 도입으로 인한 기존의 일자리 감소 효과는 커지는 반면, 새로운 일자리 창출 효과는 작아진다. 게다가 한국에서 만들어질 일자리가 자본 및 기술과 함께 신흥국가로 또 고임금을 주는 숙련 일자리는 선진국으로 유출된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과 함께 70년 전에 만들어진 노동법의 개혁에 나섰다. 노동 개혁에 성공하면 한국 사회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미국마저 부러워하는 세계 최고의 디지털 하드웨어 인프라나 국민의 교육 수준을 살리지 못하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국민의 노동에 대한 의식은 어떤 나라보다 역동적인데 법·제도가 실현을 가로막는 문제도 극복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노동력의 이동을 촉진해, 고임금 일자리가 감소하고 또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못사는 비극도 막을 수 있다. 노동법 현대화의 성공 여부는 국민이 노동 개혁의 중요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협조하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