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33호 2022년 8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대학시절은 나의 황금기였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대학시절은 나의 황금기였다


유자효
불어교육68-75
한국시인협회장



문예부흥 꿈꾸며 치열한 합평
학생증 맡아주던 통술집 추억


누구나 자기 생애의 황금시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유년기에, 또는 청년기에 황금기를 맞기도 한다. 운동선수들이나 뛰어난 연주자들이 그 경우에 속할 것이다. 또는 부모를 잘 만나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
때로는 장년기에, 때로는 노년기에 황금시대를 맞기도 한다. 인생이 무르익어가면서 맞이하는 황금기는 한 사람의 생애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처럼, 성숙한 인생이 발하는 광휘는 그 사람의 생애가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나이 70대 중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도 용서받을 나이는 되지 않을까? 내 생애의 황금기는 과연 언제였던가?

되돌아본 내 생애의 황금기는 단연 대학시절이었다. 우선 그때는 양친이 모두 계실 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것은 나의 최대의 행운이었다.

동기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진학하니 당시 사범대학에는 이른바 문예부흥(Renaissance) 운동이 팽배했었다. 우리보다 10년 가까운 선배들이 문리대에서 벌였던 ‘산문시대’를 사범대학에서 부흥시켜보자는 야심찬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대문학회에서 일었던 그 운동의 중심에는 국어과의 김재홍, 신상철, 윤상운이 있었다. 그리고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김태일과 장영간이 정신적 형이었고, 이문열, 김한영, 우한용 등이 자주 뭉쳤다.

우리들은 매주 작품 합평회를 했었는데 분위기가 치열했다. 지금 돌아보면 실력보다는 의욕이 앞서가던 젊은 혈기의 경연장이었다. 합평회가 끝나면 학교 근처의 통술집에서 2차 모임이 열렸으니 콘사이스나 학생증까지 맡아주던 술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태일은 아침에 충혈된 눈으로 나타나서는 밤새 소설 한 편을 썼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불태워버렸다는 말을 예사로 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우리는 선농단 터인 청량대에서 시화전도 하고, 문학의 밤도 열어 나름 문학적 분위기에 빠져 지냈다. 그리고 당시 문단에 진출한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기부금을 받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착취결사대’라고 명명했는데, 김광협, 김원호, 유성규 시인, 박해준, 김국태 소설가 등이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그 기금으로 ‘창작시대’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패기와 치기가 어우러진 산물이라고 하겠다.

습작과 합평에는 거칠 것이 없었으나 연애에는 서툰 소년들이었다. 잘 안되는, 때로는 실패한 연애담이 우리들을 울리곤 했다.

1년 반 동안의 대학시절을 질풍노도 속에서 보낸 나를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접고 창원훈련소에 입소하였다. 6주 신병 훈련 후 육군병기학교에 배속된 나를 김한영이 찾아왔다. 그가 전한 소식은 ‘김태일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선배 문인의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지하도에서 실족 추락사했다는 비보였다. 나는 군 면회소인 것도 잊고 엉엉 울었다.

나의 사대문학회 시절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제대를 하고 돌아온 대학에서는 후배들이 우리의 뒤를 잇고 있었다. 나는 취직을 걱정해야 하는 복학생으로 변신하였다. 대부분 신춘문예 등으로 등단하고 유명 문인들이 되었다.

복학생 시절 나는 대학 후배와 만나 뒷날 결혼에 이르러 이제 손자까지 두게 됐으니 모교는 내게 긴 생명을 선사했다. 우리들의 가슴 설렌 ‘기쁜 우리 젊은 날’의 결실이었던 셈이다.



*유 동문은 모교 졸업 후 KBS 유럽 총국장, SBS 이사, 한국방송기자클럽 회장을 지냈다. 1972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해 시집으로 ‘성자가 된 개’, ‘신라행’, 시선집 ‘성스러운 뼈’ ‘세한도’, 시집해설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 등을 냈다. 정지용문학상과 김삿갓문학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