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31호 2022년 6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뒤늦게 관악캠퍼스를 찾는 이유

최홍섭 전 삼성미래전략실 전무·칼럼니스트

뒤늦게 관악캠퍼스를 찾는 이유



최홍섭
정치82-86
전 삼성미래전략실 전무칼럼니스트


꽃 피어도 무채색이던 캠퍼스
40년 지나 그 다채로움 보이네

1980년대 학부와 석사과정 6년간 관악캠퍼스는 낯선 여행지 같은 무채색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렀고 관악캠퍼스는 세상 어디보다 컬러풀한 미소로 나를 반겨 준다. 늦바람이라도 난 것일까.

돌이켜 보면 폐렴 합병증으로 검정고시를 거친 나는 직접 원서를 들고 관악캠퍼스를 찾았다. 웬일인지 교문 앞 가게에서 헨델의 메시아 중 ‘우리를 위해 나셨네’란 합창곡이 울려 나왔다. 친숙한 멜로디는 긴장한 수험생에게 용기를 주었고, 지금도 그 곡만 들으면 새하얗게 눈 덮인 관악캠퍼스가 떠오른다.

이미 입학 전부터 대학생들에 섞여 구호를 외치던 나는 과 선배의 권유로 학생회관에 있는 어느 서클룸을 찾았다. 사회학과 선배와 마주 앉았다. 한국사회의 모순과 군사정권의 억압에 공감하며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 선배는 너무 일찍 패를 보였다. 갑자기 모든 모순의 해결사로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중학생 시절부터 조선노동당 역사를 비판적으로 탐독해온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닌 건 아닌 거다. 1시간 넘게 논쟁을 벌였고, 결국 “어떤 모순을 해결하려고 훨씬 더 큰 모순에 의지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 뒤 돌아서 나왔다.

허전해진 신입생 마음은 야구가 붙들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를 좋아하던 나는 책으로 펴내고 싶었을 정도로 야구광이었다. 물론 그 소원을 40년 뒤인 올해 초에야 이뤘지만. 당시 사회과학대학 야구부원 모집공고를 보고 달려가 캐치볼을 하면서 ‘입단’을 허락받았다. 지금 경영대학이 있는 장소가 허허벌판 야구장이었다. 지도교수는 35세의 정운찬 교수였는데, 가끔씩 핀치히터로 직접 타석에 들어서기도 하셨다. 재미를 붙이던 야구부 생활은 얼마 뒤 어깨에 고장이 나면서 포기했다.

3학년 때는 대학신문 제1150호에 ‘부활절과 4.19는’이란 글을 기고했다. 실수가 있었다. 부활절은 4.22인데 4.15라고 적었다. 의미가 중요하지 날짜가 대수는 아니었지만, 훗날 기자 생활을 할 때 팩트체크를 강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 연세대에 절친들이 생기면서 3학년부터 대학원 2학년까지 4년간 신촌캠퍼스를 자주 드나들었다. 정치학 교과서로 유명한 이극찬 정외과 교수의 강의는 유머가 넘쳤고, 연세대 야구팀의 연습경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틈만 나면 정문에서 신촌으로 가는 142번 시내버스를 타곤 했으니, 관악캠퍼스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드디어 석사학위를 받고 난 뒤 난 관악캠퍼스에 다시 오지 않을 줄 알았다. 17년간의 기자 시절에는 서울대를 찾을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삼성으로 옮기고 대학생 커뮤니티인 ‘영삼성’도 맡으면서 다시 관악캠퍼스와 친해졌다. 전국 순회 토크콘서트인 ‘열정樂서’ 담당 임원으로 서울대 문화관에서 서너번 행사도 개최했고, 수천명의 모교 후배들이 청중으로 참석했을 때 보람을 느꼈다. 때마침 아들이 11학번으로 공대에 입학하면서, 이런저런 핑계로 관악캠퍼스를 방문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학창 시절에는 관악산을 딱 한 번 올라갔다. 교련 수업을 마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기들과 함께 올랐다. 꽤 힘들어 다시 안 간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55세부터 등산을 본격 시작한 뒤 관악산 정상 연주대만 30번을 찍었으니 격세지감이다. 늘 순환도로 맨 위에서 등산을 시작하고 내려오면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1980년대에도 관악캠퍼스는 온갖 꽃들이 요란했을 터인데, 암울한 시국 때문인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관악캠퍼스의 화사한 벚꽃과 울긋불긋 단풍에 반했고, 매년 수백장의 사진을 찍어 아름다움을 저장하고 있다. 그렇게라도 하면서 학창시절 관악캠퍼스에 대한 소홀함을 조금이나마 만회하는 기분이 든다.




*최 동문은 신문기자로 17년, 대기업 임원으로 15년을 지내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왔다. 저서로 ‘두바이 기적의 리더십’ 등에 이어 최근 생생한 고교야구 얘기를 담은 ‘그 시절 우리는 미쳤다: 1970년대 고교야구’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