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호 2025년 1월] 뉴스 기획
관악 종합화 50년③ 75학번이 돌아본 관악
1975학번들의 추억담
75학번이 돌아본 관악
질문
1. 입학 당시 인상이나 분위기
2. 기억에 남는 교수님과 그 이유
3. 관악캠퍼스 추억의 장소는
4. 모교에 바라는 점
데모 방지용 격리란 부정적 이미지도

고승철(경영75-80)
소설가
1. 1975년 3월 5일 관악캠퍼스 본관 앞 광장에서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입학식을 가졌다. ‘통합 캠퍼스’ 또는 ‘데모 방지용 격리’라는 긍정적, 부정적 의미를 함께 지닌 출범이었다. 남학생 대부분은 교복을 입었다. 학기 초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사회계열 같은 반 동기생 박원순 군(훗날 서울시장)이 제적됐다. 학우들은 분노했고 같은 반 강금실 양(훗날 법무장관)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1, 2학기 휴교령이 내려져 정상 수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2. 경영학과 교수 가운데 언제나 열강하신 신유근, 김원수, 최종태, 한희영, 민상기 교수님이 기억에 남는다. 조동성 교수님, 강의는 듣지 못했지만, 청바지 패션이 돋보였다. 경제학과 이현재 교수님, 재정학 강의를 들었고 훗날 내 결혼식 주례를 서주셨다. 경제학과 조순 교수님, 부총리로 취임했을 때 나는 경제기획원 출입기자였는데 그분의 행적을 정리한 ‘학자와 부총리’라는 내 첫 저서를 냈다. 불문학을 부전공했기에 정명환, 이환, 오현우, 곽광수, 김광남(문학평론가 필명 김현) 석학 교수님들의 명강을 들었다.
3. 기숙사인 관악사에 1975년 가을학기에 살면서 여러 추억을 쌓았다. 새벽에 캠퍼스 순환도로를 한두 바퀴 조깅하고 샤워하는 환희를 누렸다. 1978년 여름방학 때 관악사에서 2주일간 진행된 영어캠프도 좋은 경험이었다. 원어민 강사와 함께 생활하고 영어로만 대화하는 알찬 프로그램이었다. 같은 조원 고광수, 서정희, 이상영 학생은 75학번 동기생이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친하게 지냈다.
4. 공공선을 실천하는 인재를 키우기를 바란다. 서울대가 각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다보니 비리에 연루되는 동문도 적잖이 나타난다. 그럴 때 여느 국민들의 실망은 크고 지탄은 더욱 강하다. 사회정의, 공익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실험실에서 즐긴 공부 아직 생생

김원숙(생물교육75-79)
전 장원중학교 교장
1. 1975년 3월 관악캠퍼스에서 입학식을 했다. 내 마음속의 푸르른 희망과는 대조적으로 붉은 흙과 회색빛 건물이 들어서 있는 관악의 3월은 황량하기만 했다. 고교 교복에 갇혀 제한받던 삶으로부터 자유롭고 희망찬 미지의 삶으로의 출발은 회색빛 건물의 기운조차 제 삶의 단단한 기반으로 느껴졌다. 2학년 때 생물교육과로 진급하면서 좋아하는 분야만 공부하게 돼서 무척 좋았다. 친한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저의 소중한 일부분이다.
2. 장남기 교수님이 기억난다. 제자들을 무척 아끼셨다. 유난히 큰 눈과 주먹코를 가지신 교수님은 우리 과의 중심이셨고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장 교수님은 생태학을 전공하셨는데 나는 식물에 애정이 넘쳐나서 과학적인 접근이 어려웠다. 마침 3학년 때 발생학 전공이신 정해문 교수님이 부임하셨다.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따끈따끈한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되어준 교수님이시다. 발생학의 권위자이신 정 교수님의 제자가 되어 현미경 속의 학문을 아는 혜택을 누리며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3. 사범대학 생물실험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좋아하는 공부를 무척이나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실험실뿐 아니라 관악캠퍼스에서 보낸 시절과 모교에서의 공부는 내 인생 중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20대의 풋풋한 젊음과 학문의 맛을 마음껏 누리던 그 시절이 그립다.
4. 풍성해진 나무들과 같이 나의 모교도 풍성한 학문의 열매들을 맺기를 바란다.
최루탄 가스 자욱 눈물 흘리고 다녀

이승우(법학75-79)
라마다군산호텔 회장
1. 유신헌법이 공포된 지 3년이 되는 시점으로, 유신헌법 철폐 시위가 대학가에서 수시로 있었다. 종합화 전까지 서울대는 단대별로 시위를 하다 보니 연세대나 고려대보다 시위 규모가 작았었다. 그러나 종합캠퍼스로 바뀐 이후 시위의 규모가 커졌고, 그 여파로 관악파출소는 ‘동양 최대 파출소’란 자조적인 별칭이 붙었다. 학생들도 최루탄 가스에 눈물 흘리고 다녔지만, 시위 진압하는 경찰대원들도 고생이 많았다.
2. 학생담당 부처장 백충현 교수님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으로 학자로서 뛰어난 실적을 내신 동시에 학생들의 시위 현장에서도 몸으로, 마음으로 제자이자 후배들의 안전을 위해 고군분투하셨다. 학생들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가면, 각종 명목을 만들어 학생들을 훈방시켜서 학교로 데리고 오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셨다. 친형님 같은 교수님이셨다.
3. 당시 법대는 문과 계통 대학 건물 중에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미대와 음대를 거쳐 법대로 가는 길과 그 길에 펼쳐진 푸른 초원을 좋아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진 모르겠지만, 당시엔 푸른 초원이 상당히 넓었고, 그 초원 사이로 학생들이 다니다 보니 오솔길이 조성됐다. 그 초원이 당시 유행했던 미국 드라마 ‘보난자’의 무대가 된 ‘판다로사’와 비슷하다고 하여, 저와 제 친구들은 그 초원을 ‘판다로사’라고, 그 오솔길을 ‘초원의 길’이라고 불렀다. 그리운 곳이다.
4. 모교가 세계 제일의 대학교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들은 날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민주화 됐고,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 됐다. 세계적인 연구실적과 학문적 성과를 보여주시길 바란다.
버들골서 말 걸어온 남학생은 뭘 할까

이재강(언어75-79)
전 대전대학교 교수
1. 입학 당시 서울대 분위기를 말한다면, 건물에 대한 인상이 먼저 떠오른다. 관악산에 위치한 때문인지 캠퍼스가 자연과 잘 어우러져 신선한 감마저 돌아 좋았었다. 그러나 언어학과 건물인 3동은 그 방향상 6월 초가 되어도 해도 잘 들지 않고 냉기도 남아 있어 감기에 걸린 학생들이 많았었다.
2. 재학 시절 기억에 남는 교수님은 이현복 지도교수님을 제외하고 2분이다. ①문양수 교수님은 지도 교수님은 아니었어도 나에 대한 학문적 배려로 제가 교수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신 잊을 수 없는 교수님이시다. ②고 신익성 교수님은 나의 결혼을 축하해주시는 의미로 짜장면을 사 주신 유일한 교수님이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평소에 굉장히 ‘짠’ 분이셨다고 한다.
3.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는 버들골이다. 당시만 해도 내외하는 서울대 남학생들 때문에 쓸쓸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버들골에서 씩씩하게 말을 걸어온 법대생 남학생이 있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캠퍼스의 낭만을 선사하는 곳일지 궁금하다.
4. 모교보단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 후배들이 한 인간으로서 인격적 성숙을 갖춘 사회인으로 거듭날 것을 간절히 원한다. 사회에 필요한 참 일꾼은 전문성 외에 성숙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