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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호 2022년 2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녹두거리서 마셨던 따뜻한 정종 한 잔…

장서희 동문 에세이

녹두거리서 마셨던 따뜻한 정종 한 잔…


장서희
소비자아동96-00
법률사무소 이헌 변호사


‘사깡’ 지나 수업 가던 길목 
버들골 장판 눈썰매의 추억도 


어느 경연 프로그램에서 스무 살의 앳된 가수가 30년 전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듣는 순간 나에게 90년대를 소환해준 그 노래는 이선희의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도 90년대의 일이다. 그나마 친구들보다 1년 늦은 입학이었다. 

학교를 갈 때면 입학 전 떠올리던 샤 정문이 아니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조촐한 후문을 통과해 다녔다. 그때 타고 다니던 낙성대 마을버스의 종점이 버들골이었다. 버들골에서 내린 수많은 인파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사범대, 인문대, 약대로 금세 흩어졌다. 나 역시 그 틈에서 ‘사깡(사범대학 깡통식당)’을 지나 인문대, 사범대 그 어디쯤에 속해 있는 강의실을 찾아갔다. 

조그만 과였지만 그 와중에 아웃사이더 행세를 했다. 그럼에도 학교를 챙겨 간 것은 아웃사이더 동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고사를 보던 날 화장실에서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났다. 통성명조차 한 적 없었는데도 하마터면 인사를 할 뻔했다. 일년 내내 같은 학원을 다닌 터라 서로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과에서 첫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날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동시에 학원 얘기를 꺼내며 웃었다. 그 날 우리는 삐삐 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친구의 삐삐 연결음은 박진영의 ‘너의 뒤에서’였다.  

우리는 같은 학원 출신을 한 명 더 포섭해 셋이 자주 어울려 다녔다. 친구들이 웃긴걸스, 종로3인방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학교 생활은 ‘핵인싸’ 못지않게 다채로웠다. 디지털카메라도 없던 시절, 필카를 들고 다니며 사진도 많이 남겼다. 봄이면 벚꽃놀이를 하고 413 순환버스로 학교 일주도 했다. 굳이 날을 잡아서 그 멀다는 공대 폭포를 답사하기도 했다. 학교 곳곳에 우리만의 지명을 붙이며 쏘다녔고, 오가며 자주 보는 (본명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애칭을 만들어 불러주는 실없는 놀이도 했다. 지금 체중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총장잔디에서 셔틀을 타면 셋이서 두 자리에 끼어 앉아 가기도 했다. 내가 관악에서 쌓은 추억은 그 친구들과 만든 것이 반 이상이다. 


일러스트=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나머지 기억들은 동아리에서 보낸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동아리에서도 늦깎이 신입생이었다. 한참 데면데면 지내다 동기여행을 따라가면서 어린 동기들과 절친해졌다. 대동제 때는 속보전 때문에 밤을 새워 암실에서 작업하는 모범생 동기도 있었고, 나처럼 밤새 놀기만 하던 동기들도 있었다. 봄밤의 관악 날씨는 춥지도 않고 참으로 좋았다. 

눈이 아주 많이 왔던 어느 날에는 동아리방에 있던 장판을 들고 나와 버들골에서 단체로 눈썰매를 탔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장판이 왜 동아리방에 있었는지, 또 그 깜깜한 밤에 다 큰 애들이 어찌 그러고 놀았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그날의 버들골 썰매장은 어떤 스키장보다 더 짜릿하고 즐거웠다. 뒷풀이로 녹두에 내려가 따뜻한 정종을 마셨다. 썰매타기를 하지 못했던 선후배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하얗게 김이 서려 있던 가게 유리창이 생각난다. 

관악을 떠난 뒤 새로운 공부를 하느라 타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대학의 추억이란, 관악에서 함께한 친구들과의 기억이 전부이다. 돌아보니 그때의 많은 기억들이 흐릿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이 그만큼 오래 흘렀다. 그래도 내 젊은 날을 기억해주는 친구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고 있어 다행이다. 날이 좋아지면 친구들과 함께 아직 바래지 않은 추억의 책장을 찾아 그 시절 버들골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어느새 잊어버리고 만 그 시절 내 모습도 지금의 그 아이들 목소리로 들어보고 싶다.


*장 동문은 모교 졸업 후 인하대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중앙대에서 영화와 법을 강의한다. 책 ‘할리우드 독점전쟁’을 펴냈고, 데일리한국에 칼럼 ‘장서희 변호사의 법과 영화 사이’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