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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호 2024년 11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1만 겁의 인연들을 되돌아보며

김준희 (기악96-00) 피아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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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겁의 인연들을 되돌아보며



김준희
(기악96-00)
피아니스트·작가

 

올여름, 귀국하고 처음으로 가르친 학생이 첫 대학강의를 하게 되었다며 전화를 했다. 15년 가까이 연락을 계속해온 제자에게 칭찬과 격려를 해주다가, 문득 대학 시절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몇몇 인상 깊었던 강의가, 그 강의실의 풍경이 영화의 장면처럼 재생되었다.

대학 첫 교양 수업은 서양문화사(주경철)’였다. 매주 책을 읽고 레포트를 제출하고 토론을 하며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A4 세 장 분량의 레포트가 마치 30장 같이 느껴졌고, 한 장 쓰는 데 꼬박 이틀 넘게 걸렸다.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를 비롯한 다양한 고전부터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그리고 레미제라블등의 소설을 읽었다.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페다고지’, ‘노동의 종말등은 모두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책들이었다.

조금은 건조한 듯 나긋나긋하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놓치고 싶지 않아 굉장히 열심히 듣고 필기를 했다. 폭넓은 시각으로 문화를 이해하고 미래사회에 대한 예측, 학생이 교육의 주체가 되어 문제 제기식 교육 방법을 통해 의식을 일깨우고 실천과 행동으로 사회를 변화할 수 있다는 내용의 수업은 어렵지만 재미있었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발표할 때, ‘에덴의 동쪽을 언급하고 교수님의 칭찬을 듣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의 프랑스 유학시절 프랑스어로 네덜란드어를 배운 경험과 노트 필기를 하던 방법, 커피 마시러 들어간 카페에서의 낯선 경험 등의 에피소드도 알려주셨는데, 미국에서 독일어 수업을 들으면서 문득 교수님 생각이 났다. 학부 시절 8학기를 통틀어 가장 열심히, 많은 분량을 공부했던 수업이었다.

2학년 여름, ‘독일어1’을 신청했다. 누가봐도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인, 갓 귀국한 선생님(김누리)은 독일어 교재는 펴지도 않은 채, 매 시간 독일에서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 놓으셨다. ‘제가 독일에서 학교 다닐 땐 말이죠ㅈ발음이 조금은 느끼하지만, 점잖은 어른의 옛날 서울 말투의 이야기들은 전부 근현대독일문화사였다. 그때 나는 김누리 교수님 강의의 베타버전을 한참이나 미리 본 것이다. 아비투어와 바칼로레, 교육의 상상력, 경쟁사회, 열린교육, 문화시민 등의 내용 등이 너무 새로웠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여름날의 2시간의 수업이 너무도 짧았다. 작년 여름 한 포럼에서 교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 같은 선생을 다 기억해 주고하시면서 웃으셨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강단에 선 지 어느덧 17년차가 되었다. 피아노 전공 실기과목에서는 내 제자가 더 나은 연주자가 될 수 있게 조력자가 되고 싶었고, 전공 이론 과목을 강의할 때에는 음악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심어주고 싶었다. 클래식 교양 수업에서는 더 많은 학생들이 클래식 음악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강의를 시도 중이다.

불교에서는 스승과 제자로 만나기 위해서는 1만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은 가로, 세로가 15km쯤 되는 거대한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한 알씩 꺼내어 그것이 전부 다 없어지는 길고 긴 시간을 뜻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할 때 그 인연은 500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7000,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려면 8000겁이라는 긴 시간의 인연이 필요한데,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그보다 긴 1만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사제간의 연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알 수 있다.

나는 대학시절 선근인연(善根因緣)으로 너무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지금, 내가 그들에게 좋은 스승으로 남을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아주 오래전,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풍요로운 역사와 새로운 사회 문화를 가르쳐주신 두 분 교수님께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6년간 변함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주시고, 언제나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신 지도교수님(장형준)께 말로는 부족한 고마움을 전한다.


*김 동문은 모교 음대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 박사과정과 샌프란시스코 콘서바토리 전문연주자 과정을 마쳤다. 리스트 국제 콩쿠르 등 다수의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하고 국내외에서 30회 이상 독주회와 협연무대를 가졌다. 교양서 클래식 음악 수업’, 불교와 클래식을 융합한 클래식, 경계를 넘어를 출간했다. 국립인천대와 고려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음악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