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호 2024년 9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순수의 시대
오주리 (윤리교육96-01) 시인·가톨릭관동대 교수
순수의 시대
오주리 (윤리교육96-01)
시인·가톨릭관동대 교수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나던 날, 사랑하던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뜻밖의 이별에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장마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출판사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 교수님, 하늘나라 가신 어머니께서 선물을 보내주신 것 같아요. ‘순수의 시’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작년에 출간된 나의 책, ‘순수의 시’(국학자료원, 2023)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이 상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올해로 시인으로 등단한 지 14년 차, 교수로 강단에 선 지 8년 차다. 그동안 시집 한 권과 학술서 네 권을 냈다. 매일 연구실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일상이 된 나. 이렇게 책 속에서만 사는 삶에 회의를 느낄 즈음, 이번 수상은 나의 이름에 책임을 지워주었다. 이번 수상은 시의 순교자가 되길 다짐했던 갓 스무 살, 대학 신입생 시절, 나의 초심으로 되돌려 주었다.
1996년 3월 4일, 개강 첫날이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캠퍼스에 등교하니, 안개에 잠겨 있는 아침 8시였다. 강의 시작할 때까지 1시간이나 남아서 나의 발걸음은 학생회관 문학회로 향했다. 문을 열자, 희부연 빛이 들어오는 유리창 너머로 아크로폴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기타 줄을 뜯던 한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동아리 회장이라며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간단히 입회서를 썼다. 첫 강의를 들으러 가려는데, 캠퍼스가 너무 커서 강의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회장이 몸소 길 안내를 해주며, 저녁에 신입생 환영회가 있으니 꼭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그렇게 시작된 문학회 생활, 나의 문학도로서의 꿈이 실현되는 것 같은 날들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작가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문학에 대한 꿈을 함께 키워나갈 수 있는 선배들 품에서 나는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기쁨을 느꼈다. 문학회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문학 세미나를 열었다. 김승옥, 이청준, 윤대녕 같은 소설가나 정현종, 최승자, 기형도 같은 시인의 작품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날이 오면’ 서점에서 책을 사서, 공강 시간마다 읽고, 학생회관에 모여 세미나를 한 다음, 녹두거리에 내려와 뒤풀이하는 일상이 반복되는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 관악캠퍼스의 사계가 아름답게 펼쳐졌다.
나는 문학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노트에는 잉크로 써 내려간 시상이 끄적여 있었다. 합평회는 문학청년들이 쑥스럽게 습작을 내보이는 자리였다. 문우들은 서로 습작에 대해 따뜻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3학년이 되자, 대학문학상에 투고한 나의 습작이 당선작에 뽑혔다. 문우들의 사랑만큼 나의 시가 자란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윤리교육과 학생이면서도, 불어불문학과의 전공수업인 19세기 프랑스 시 수업을 수강하면서,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발레리 등의 시를 불어로 읽는 훈련을 받았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던 나는 휴학계를 내고,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고독 가운데서 나의 내면의 거울을 응시하며 시어를 길어 올렸다.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이 가르쳐준 것처럼, 자신의 내면의 심연에 다다랐을 때, 오히려 세상과 공명하는 시가 탄생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의 대학 시절, 관악에서 키웠던 몽상의 시간, 그 시간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순수의 시대’였다고 이름 붙일 수 있을 듯하다. 그 시절이 오늘의 나를 태어나게 했다. 이번에 수상한 ‘순수의 시’의 씨앗도 그 시절의 몽상에서 자라난 것이다. 우울한 세상 저 너머, 시의 날개로 이상 세계에 가리라 꿈꾸던 순수의 시대. 그 순수의 시대가 ‘순수의 시’의 모태이리라. 나는 지금 이 순간, 나의 순수의 시대가 영원하길 다시 꿈꾼다.
*‘순수의 시’로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된 오 동문은 모교 윤리교육과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가톨릭관동대 교양대학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시인에 등단 후 시집 ‘장미릉’(한국문연, 2019)이 문체부 나눔도서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