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27호 2022년 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문화관 재건축에 써달라 100억원…“좋은 곳에 써서 기분 좋다”

이주용 (사회53입) KCC정보통신 회장

동문을 찾아서

문화관 재건축에 써달라 100억원…“좋은 곳에 써서 기분 좋다”
이주용 (사회53입) KCC정보통신 회장



“중학교 때 헌 교복 입고 입학” 몸에 밴 근검절약
미 IBM 한국인 최초 입사, 우리나라 정보혁명 씨앗 뿌려
주민등록번호·철도청 승차권 전산화 시스템 구축


대한민국 IT역사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최근 모교 문화관 재건축 기금으로 100억원을 기부했다.

이 동문은 부친이 건립한 울산 종하체육관의 리모델링 비용으로도 330억원을 쾌척했고, 그에 앞서 150억원을 출연해 ‘미래와 소프트웨어 재단’, 종하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모교 기부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병원 발전기금에 10억원, 인문대 정보문화학 기금 교수 지원 사업에 10억원을 출연한 바 있다. 2017년 회사 창립 50주년을 맞아 약속한 600억원 사회환원을 이번 문화관 재건축 기금 기부로 마무리 지은 셈이다.

이 동문은 컴퓨터의 불모지였던 1960년대 초 ‘컴퓨터 전도사’를 자임하며 우리나라에 정보혁명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 미 IBM에 한국인 최초로 입사해 IBM 한국 법인이 설립되기 전 한국 대표를 거쳐 1967년 한국 최초 IT기업으로 평가받는 KCC정보통신을 설립해 주민등록번호 전산화 프로젝트, 조선설계 소프트웨어 국산화, 철도청 승차권 전산화 시스템을 구축했다.

설 연휴 다음날인 2월 3일 서울 염창동 KCC오토 본사에서 이 동문을 만났다. 자리에는 장남 이상현(전자공학85-89 KCC정보통신 부회장) 동문이 함께했다.


-창밖으로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풍경이 좋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본격적인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게 1993년이니 벌써 29년이 지났는데,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KCC정보통신과 시스원을 각각 물려받아 잘 운영하고 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2017년 척추협착수술을 받은 이후 건강이 악화돼 재활운동을 하면서 종하장학회와 미래와 소프트웨어 재단 관계 일에만 관여하고 있었지만, 이마저도 아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최근에는 주로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가족 또는 친구들과 가끔 만나면서 소일하고 있어요.”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셨습니다. 동기가 어떻게 되세요.
“장남 뜻이 많이 반영됐어요. 전 따라 간 거예요. 받아갈 사람이 안 받아가겠다니까 내가 할 수 있었죠. 반대하면 못 하죠. 돈이 좋은 방향으로 쓰면 참 좋은데, 어려워요. 아버님이 늘 그러셨어요. ‘돈 모으기는 쉬운데 돈 쓰기가 어렵다’고.”
장남인 이상현 동문은 “지난 연말 젊은 서울대 동문 모임인 SNU포럼에 다녀와 새 문화관 리모델링 프로젝트에 대해 듣게 됐다”며 “울산에 새롭게 재건축하는 종하이노베이션센터와도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많다고 생각해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고 덧붙였다.

-기부를 하실 때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드셨어요?
“이제 갈 때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잘 쓰고 가야죠. 아이들이 달라고 아우성치지 않으니 자유롭죠. 좋은 데 쓴다고 하는데,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이런 기회도 흔치 않잖아요. 전혀 아깝지 않았어요. 5대째 부자로 간다는 것은 참 힘듭니다. 선친은 자신이 일군 돈은 대부분 사회 환원하고 가셨어요. 울산에 학교와 체육관을 지으셨죠. 갈 때 사회 환원하고 간다는 것이 집안의 전통이 돼 지금까지 잘 지내온 것 같고, 저 역시 그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이지요. 아들 대에서도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모교를 비롯해 600억원을 기부하셨는데, 처음 시작은 언제셨죠?
“2017년, 회사 창립 50주년을 맞아 한국 소프트웨어산업의 발전을 위해 금융재산의 절반을 내놓기로 마음먹었어요. 서울대 인문대 정보문화학 기금교수 지원을 시작해 올 초 문화관 재건축 기금을 끝으로 마무리한 셈이죠. 서울대는 제 모교인 동시에, 아들, 딸, 사위, 손주들의 모교예요. 가족 중 8명이 서울대 출신입니다.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남 이상현 동문을 비롯해 첫째 딸 이상원(인류84학번), 첫째 사위 민선식(경제78학번 YBM 회장), 셋째 사위 윤석민(화공83학번 태영그룹 회장), 장남의 손녀 사위 이호웅(경대원 재학 중), 차남의 장녀 이준혜(고고미술사 재학 중), 차녀 이소혜(생명과학부 22학번 입학 예정) 씨 등이 모교와 인연을 맺고 있다.

-서울대 가족이시네요.
“최근 손녀 사위까지 가족이 29명으로 늘었습니다. 곧 결혼 60주년을 맞는데, 스스로 참 다복한 사람이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대담 : 임석규(언어84-91) 한겨레 선임기자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셨는데 유학 가셔서 경제학을 하고, 또 졸업 후에는 컴퓨터 관련 일을 하셨습니다. 배경이 어떻게 되세요.
“서울대 입학할 당시,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상대만 있고 경제학과는 없었어요. 문리대에 정치학과 아니면 사회학과였기 때문에 사회학과에 입학하게 됐어요. 큰 뜻은 없었고요.
유학 가서 컴퓨터 일을 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미시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해서 졸업했는데, 취업이 잘 안 됐습니다. 취업이 너무 안 돼 골프장 웨이터로 아르바이트 하는 중 골프 하러 온 동기들을 만났어요. 너 여기서 뭐하냐고 묻지 않겠습니까. 그런 대화를 나누는데 골프장 지배인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아르바이트까지 잘리게 됐어요. 당시 손님과 대화를 하면 안 된다는 룰이 있었어요.
접시 닦는데 눈물이 나요. 서럽죠. 대학 주임 교수인 가드나 애클리 박사를 찾아가 동기들이 대부분 취업을 했는데, 제가 그렇게 부족합니까. 차별 아닙니까. 그랬더니 알아봐 주신 곳이 미시간대 사회연구소 전산연구실이었어요. 그곳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컴퓨터 오퍼레이팅 일을 했습니다. 남들 500달러 받을 때, 350달러 받고 일을 시작했죠. 사회연구소장에게 잘 보여 IBM 취업으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컴퓨터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유학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사회학과 2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 경기고 동창인 노홍희와 토론을 하다가 선진국에 나가 학업을 계속하고, 견문도 넓히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나눴습니다. 6·25 동란 때 810 CIC부대 등에서 미군 통역을 맡은 적이 있어, 당시 인연을 맺은 미 공군 중령 케임브리지씨 도움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지요. 그분이 재정보증까지 해주셨습니다.”

-IBM 직원이었으면 대우도 좋았을 텐데, 귀국하게 된 이유가 있으셨나요.
“아버님의 권유가 강했어요. 그즈음 한국에 IBM이 진출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 1963년에 한국사무소 대표 신분으로 귀국하게 됐죠. 한국에서 컴퓨터 보급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대학 등에 100만 달러 규모의 컴퓨터를 무상으로 지원한다고 해도 받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미국으로 돌아가 현장 마케팅 경험을 더 쌓고 다시 귀국했습니다. 한국에 컴퓨터를 제대로 이식시켜야겠다는 사명감이 컸어요. 방법을 찾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에 들어가 컴퓨터 관련 업무의 책임자를 맡아 컴퓨터 교육도 하고 공공기관 전산화도 주도하면서 열심히 일했죠.”

-한국전자계산(KCC정보통신의 전신)을 설립해 주민등록번호 시스템 개발, 철도청 티켓 전산화 등 굵직한 업적이 많습니다. 가장 보람된 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 연배의 사람들은 일본을 앞서야 한다는 마음을 대부분 갖고 있었어요. 모든 기술 문물을 일본 경유해 받았는데, 제가 조선업에 도입한 노르웨이의 오토콘 시스템(선박 설계 소프트웨어)으로 우리나라 조선업이 일본을 앞질러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소프트웨어 도입으로 우리나라 선박설계 속도를 비롯한 전반적인 선박기술이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KCC정보통신이 수입자동차 딜러사업에도 진출해 있습니다.
“장남이 시작한 일이에요. 처음에는 반대를 심하게 했어요. 새로운 사업을 하는 것은 좋은데, 재벌 자제들이 취미 삼아 하는 일로 여겼거든요. 우리나라 산업에 도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룹 전체 매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서두에도 말씀하셨지만, 다복한 가정을 이루셨고, 얼굴도 평안해 보이세요.
“걷지 못하고, 대소변을 보는 일도 불편하지만, 긍정적으로 살아요. 죽은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동안 잘 먹고 살았고, 이만큼 가정 이뤘으니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불편한 것은 젊은 시절 사업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일을 하는 와중에 불편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최소한의 벌 정도로 생각합니다.”

-요즘 친구분들은 만나세요? 
“만나려고 하는데, 자꾸만 줄어드네요. 이홍구 등 가끔 봐요. 중고등학교 동기에다 결혼식에 베스트맨(들러리)도 해주었지요. 미국 유학 시절 이 친구와 마찬가지로 정치학과 갈 생각도 있었고요. 당시 미시간대 정치학과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졸업하기도, 박사학위 받기도 쉬웠어요. 실제 정치학과 학과장과 가까워 정치학으로 공부를 더 하라는 조언도 받았고요. 한국 관련된 논문 쓰면 적절하게 박사학위 주겠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안 들은 게 참 후회가 돼요. 정치학 박사학위가 있었다면, 활동 범위가 더 넓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박사학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고물이란 별명이 있으시던데.
“중학교 입학 때 아버님께서 교복을 사주셨는데, 새 옷이 아니라 헌 옷을 사주셨어요. 그것도 제 몸보다 큰 거로요. 워낙 근검절약하시던 분이라서요. 옷도 큰데, 주머니에 온갖 잡동사니를 다 넣고 다녔어요. 주머니 검사를 하다 별의별 게 다 나오니 친구들이 웃고 고물이라고 놀리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별명이 됐습니다. 그 시절 추억이 담긴 별명이라 싫지 않아요. 호도 고물로 하고 싶었는데 주위의 만류로 그러질 못했어요. 지금도 고물로 통합니다(웃음).”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지난 60여 년을 뒤돌아보면 매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고살기에 급급하던 1960년대 IT불모지인 한국에 컴퓨터를 도입하겠다는 제 생각에 모두들 냉소적이었지만, 컴퓨터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도전해 왔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를 맞아 후배들이 갖춰야 할 리더십을 저는 변함없이 ‘도전’과 ‘최선’이란 단어로 함축하고 싶습니다.”

정리=김남주 기자


프로필

△1935년 경남 울산 출생 △53년 경기고 졸업 △54년 미국 아칸소대 경제학부 입학 △55년 미시간대 경제학부 편입 △58년 미시간대 졸업 △59년 미시간대 사회과학연구소 슈퍼바이저 △60년 미시간대 대학원 2년 수료 △60년 미 IBM 입사 △63년 미 IBM 한국 대표 △67년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 소장 △68년 모교 경영대학원 강사 △68년 철도청 EDPS 개발위원회 위원 △71년 한국전자계산 대표이사 △85년 종하장학재단 이사장 △89년 한국전자계산기술 대표이사 회장 △91~96년 미시간대 총동문회 회장 △2016년 금탑산업훈장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