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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호 2021년 5월] 기고 에세이

어문정책에서 서울대인의 역할

박경범 소설가


어문정책에서 서울대인의 역할



박경범
계산통계78-82
소설가


대학 때 주로 영어로 교과목을 배웠고 일학년 국어교과 시간에는 한자 공부 과제를 소홀히 하여 전광용(全光鏞) 선생님께 꾸중 받은 일도 있었지만, 자연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소설을 쓰면서 작품 내 창조물의 명칭과 새로운 표현을 위해서는 한자의 사용이 필수였다.

그런데 출판업자와 일부 문단 선배로부터는 한자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와 권유를 받았다. 만약에 내가 인문계열 전공으로서 스스로는 한자를 많이 알면서도 근세사 및 현대사의 국내외 세력들의 역학관계를 숙지하고 있었다면 융통성이 발현되기 수월했겠지만, 한자에 능통 여부를 떠나 정보과학적인 해상도에 집착하는 이과생의 사고로는 쉽사리 타협되지 않았다.

그 결과는 문학 생활의 위축과 소외였는데, 그럼에도 지금까지 20여 년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소명이 있었음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수십 년간 여러 차례 불합리성이 제기되었음에도 여느 정권하에서도 이런 어문정책이 이어지는 것은 당장 눈에 띄게 불이익을 받는 분야나 계층의 집단이 없다는 것에 있다. 특히 각 전문인 집단은 오히려 편리하다. 국민은 위력(威力)에 의한 성폭행이나 위계(僞計)에 의한 성폭행이나 비슷한 죄로 알기 때문에 기초법률단어부터 법조인의 자문을 얻어야 한다. 조울병(躁鬱病)과 조현병(調絃病)을 비슷한 병으로 알기 때문에, 역시 기초단어부터 정신과 전문의에게서 자문을 받아야 한다.
불이익을 받는다면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는 직종에서 자기의 뜻을 지성을 담아 정확히 발표하는 것이 억압되는 일인데 구체적으로는 일부의 문학인들이 해당할 것이다. 물론 일반 국민이 지성을 접하지 못함으로써 받는 불이익이 가장 크지만, 이것은 피해자 스스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화사회라는 곳에서 지성의 보편적 영향력의 상실이 진행되고 있는데 다만 ‘무지한’ 국민대중이 그 피해를 모른다고만 해야 할까. 서울대인을 비롯한 지성인 부류도 다중(多衆)과의 원활한 소통의 기회를 잃음으로써 그 피해는 점차 구체화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인은 잠식되어가고 있는 지성인의 권익을 되찾아 지식표현의 자유를 더욱 얻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높은 층에 살고 있다고 물이 차올라 건물이 잠기는 것을 모르고 지내야 할 것인가. 당장에 권력이나 수입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자신의 배경은 구미(歐美)지역이니 불리한 것이 아니라고, 안일하게 생각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서울대라는 특정 학교 동문의 이익을 떠나 대한민국의 지성 있는 자들이 자신의 지성을 세상과 소통할 권리를 발전시켜 전 국민과 온 인류에 보탬이 되기 위함이다.

더 이상 지성인의 얼이 이 땅에서 위축되어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물고기(魚)가 물(水)에서 떨어져 살 수 없듯이 서울대인은 지성 표현이 보편화된 세상에서야 그 빛을 더욱 발휘하고 자라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유구한 문화전통을 가진 대한민국 이 땅이 앞으로 지성이 결여된 영혼들이 선호하는 선택지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